졸업을 앞둔 시점에 내 수중에는 800만 원이 있었다. 그동안 과외로 생활비를 벌어서 쓰고,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악착같이 모아 둔 돈이었다. 거기서 100만 원쯤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느라 생기는 불편함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원래 고민이 많고 결정이 느린 편인데, 그날따라 전단지를 받아 들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네, 하늘안과의원입니다."
"학교에서 전단지를 받았는데요."
"네, 고객님."
"라식수술 진짜 100만 원인가요?"
상담원은 정확한 진단을 위해 방문상담이 필요하다고 했다. 상담 날짜를 예약하고, 병원에 방문했다.
병원에 도착했다.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으리으리한 건물이다. 크고 시설이 좋았다. 병원은 라식이나 라섹을 하러 온 환자들로 북적였다. 주변에 좋은 병원을 수소문하거나 인터넷으로 비교 검색해 본 것도 아니면서 왠지 믿음이 갔다. 그냥, 내 눈을 맡겨도 될 것 같았다.
상담실로 들어섰다. 라섹과 라식 중에 수술 방법을 골라야 했다. 내 눈의 상태를 보더니 라식 수술이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가격도 내가 전단지에서 본 가격과 비슷했다.
빠르게 수술 날짜를 잡았다.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왕 할 거라면 빨리 안경을 벗고 싶기도 했고, 학교와 제휴를 했다고 하니 내심 졸업하기 전에 수술을 해야만 혜택을 받는다는 압박감도 느꼈던 모양이다.
드디어 수술 당일. 나는 용감하게도 아무런 보호자도 없이 혼자서 빨간 시외버스를 타고 강남 병원에 갔다. 당시 살고 있던 병점의 부모님 집에서 한 시간은 넘게 버스를 타야 도착하는 먼 거리였다.그 정도 거리쯤이야 가는 데는 당연히 문제가 없었다. 더 멀리 신촌까지도 통학을 해 본 몸이다. 대중교통으로 원거리를 다니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병원에 들어서자 약간은 긴장이 되긴 했다. 먼저 수술을 한 지인들의 경험담을 상기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내 이름이 호명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수술대에 올랐다. 눈에 국소마취를 했다. 감각은 없지만 정신은 온전한 상태로 수술이 시작되었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환자인 내가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눈을 뜨고 있는 것이었다.
눈앞에 환한 빛이 들어오고, 수술 도구들이 눈을 건드리는 느낌이 나고, 왠지 시린 느낌이 이어지고,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가, 다시 잘 보이는 듯하고, 무엇이 열리는 듯했다가, 다시 닫히는 것 같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신비로운 느낌들이 이어졌다.
그 상황에도 나는 꿋꿋이 눈을 뜨고 시선을 고정했다. 그것만이 이 수술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인 일이었으므로.
"다 됐습니다."
나는 안내에 따라 데스크에 가서 수납을 완료하고, 건물 1층에 있는 약국에 가서 약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손에는 약국에 제출할 종이가 쥐어졌다.
나는 수술이 끝나면 바로 몽골인처럼 눈이 잘 보일 줄 알았다. 그런데 눈에서는 이물감이 느껴지고 눈앞이 뿌옇게 흐렸다. 큰일이었다. 갈길이 구만리인데 당장 건물 1층의 약국도 찾아가기 힘들게 생겼다니.
분명 먼저 수술을 경험한 지인은 수술을 마치자마자 일상생활이 가능했다고 했다. 혼자 수술을 받고, 다시 혼자서 교회 수련회에 참석했다고 했다. 그 말은 나에게 큰 용기를 주었지만, 동시에 큰 방심을 하게 만들었다. 나도 당연히 혼자서 이 모든 것을 수월하게 해낼 줄 알았다. 그래서 그냥 털레털레 혼자서 병원으로 왔던 것이다.
나는 우선 태연한 척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잘 보이지 않지만 그냥 '짬으로' 때려 맞춰 1층을 눌러 병원 밖으로 나왔다. 보이는 만큼만 보면서 약국을 찾아갔다. 종이를 제출해서 필요한 약을 구입하고,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길을 어떻게 걸었는지, 어떻게 그냥 그 상태로 집에 갈 용기를 냈는지 모르겠다.
당시의 나는 너무나 용감하고 독립적이어서, 혼자서 그 추위를 뚫고 버스를 타고 집에 가기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앞으로 닥칠 일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