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대주주인 아내에게

2024년 주주서한

주주서한은 주식회사에서는 주주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의미합니다. 워렌버핏의 주주서한을 읽다가 문득 "나는 내 삶의 주주에게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성해 봤습니다. 내 삶의 대주주인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나의 삶을 소유하고 있는 아내에게

<여는 말>

저와 인생의 여정을 함께하기로 한 아내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아내의 남편이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두 가지 모두 제 인생의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점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선택으로 저는 이전과는 다른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그에 따르는 책임 역시 훌륭하게 해내고 싶습니다.

저는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적인 존재이지만, 두 가지 책임을 가장 우선해서 수행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가장으로서 가족 구성원들에게 경제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가족 구성원들과 정서적 유대감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책임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제가 개인적으로 이루고 싶은 일들을 틈틈이 해보고자 합니다. 이 말이 가족을 위해 제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제 삶의 가장 중요한 역할에 대한 책임을 더 우선시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편지는 제게 주어진 책임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작성해 봤습니다. 조금 강하게 표현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 부분은 설명일 뿐이지 설득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제 설명을 읽고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갈 미래에 대해서 중요한 질문들을 해주시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같이 찾아나가기를 기대합니다. 결국 앞으로의 미래는 우리가 같이 만들어 나가야 하니까요.

<가치관>

제가 가진 책임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 설명하기에 앞서 제가 가진 가치관을 먼저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 편이 저라는 사람을 이해하기에 훨씬 더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한 사람의 가치관에는 삶의 우선순위와 세상을 보는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1. 자유를 중시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자유는 선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유롭다는 건 내가 원하는 시점에 내가 원하는 대안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100만 원을 벌기 위해 내가 언제든 원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다면 적어도 이 사안에 대해서 저는 자유로운 상태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경우에 저 스스로 선택의 시점과 대안을 결정할 수 없다면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누구나 자유로워질 수 있지만(일부 독재 국가를 제외하고), 누구나 자유를 누리고 사는 건 아닙니다.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도 사람들마다 자유를 누리는 정도는 다릅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건 돈과 능력일 것입니다. 한 사람이 지금 얼마나 많은 돈을 쓸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높은 수준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자유를 누리는 정도가 달라진다고 믿습니다.

제가 끊임없이 공부하고 새로운 경험을 쌓으려는 이유는 결국 자유로워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공부하고 경험을 쌓을수록 제가 가진 능력이 더 커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능력 개발의 주된 목적이 안정적인 직장과 높은 연봉을 성취하기 위함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제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상황에 맞춰 여러 선택지를 가질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한 목적이 더 주요합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박사학위를 받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그 상황에서 제가 취할 수 있는 선택 대안이 충분히 많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2. 자연스러움을 추구합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기질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일정 부분 타고난 측면도 있을 테고, 어렸을 때 경험이 영향을 미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화 과정에서 훈련으로 만든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 자신이 가진 고유한 성격과 기질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주변을 의식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행동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곳곳에서 규범, 문화, 통념, 인식, 기대 등의 이름으로 우리가 특정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압력을 받습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자신의 성격과 기질대로 행동하지 못하니까요. 속세를 떠나서 자연인으로 살 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는 주변에서 기대하는 모습에 자신을 맞출 필요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하면 자신의 고유함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놓고 본다면 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삶의 과정에서 제 고유함을 잃고 싶진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제 고유함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발전시켜 나가고 싶습니다. 제 고유함을 발전시키면서도 사회생활을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가진 성향과 기질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 집단에서, 저에게 맞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면 말이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한 저는 끊임없이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다녀야 할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아무리 찾아도 그런 자리가 없으면 언젠가는 제가 갈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3. 적자생존의 원리를 이해합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 대학 때 생태학을 공부하면서 마음 깊이 새겼던 자연의 섭리입니다. 적자생존의 원리는 사회에서도 적용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보다 똑똑한 사람도 많고, 부자인 사람도 많고, 다방면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결혼도 하고 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고 있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적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 제 커리어를 어느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갈지 고민할 때 가장 중심이 되었던 기준이 바로 적자생존의 원리였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30년, 50년 동안 살아남으려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 고민의 결과로 지금은 제너럴리스트로서 경험과 역량을 쌓고 있습니다. 제너럴리스트는 다방면에서 뛰어남을 인정받아야 하고, 융합 영역에서는 탁월함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서도 장기적으로 수월하게 적응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너럴리스트로서 가장 중요한 역량을 뽑으라면 저는 글쓰기와 수학을 뽑습니다. 글쓰기는 논리적 사고의 정형화된 결과물이고, 수학은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몇 가지 수식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꾸준히 글을 쓰는 이유도 제너럴리스트로서 역량 향상을 게을리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수학적 사고는 사칙연산만 제대로 활용해도 충분합니다.

제 가치관을 설명하는 핵심 단어는 자유, 자연, 적자생존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위 세 가지 단어로 저라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기를 기대합니다.

<책임>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가장으로서 어떻게 경제적 책임과 유대적 책임을 수행해 나가는지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한 존재적 책임에 대해서도 간단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경제적 책임

2023년 원천징수 기준 연봉은 x원이었습니다. 통계를 찾아보니 전체 근로자 중에서 상위 x%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나옵니다. 지난해 세금이 약 x원 정도 나왔으니, 세금을 제외하고 x원 정도 순수입이 예상됩니다. 생활비로 한 달에 300만 원 쓴다고 하면 매년 x원은 저축할 수 있는 돈을 버는 셈입니다.

2015년 첫 직장 생활을 했을 때 연봉은 x원 수준이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약 2배의 연봉 상승률을 이뤄냈습니다. 통상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 시장 가치가 가장 가파르게 오른다는 걸 고려하면 앞으로 5년 내에 연봉 x원 이상이 될 가능성은 높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계속해서 열심히 해야 하고, 또 운도 따라줘야 하겠지요.

연봉에 비해 우리 자산은 많지 않습니다. 현재 순자산은 약 x원 정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세부적으로는 전세자금 x원, 주식 x원, 현금 x원이 있습니다. 전세대출은 x원이 있습니다. 참고로 2023년 통계에 따르면 가구별 평균 순자산은 4.3억 원이라고 합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는 전략기획 본부장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회사의 제품 전략과 사업 전략을 총괄하는 자리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제품을 만들지, 누구한테 판매할지, 어떤 시장에 진입할지, 어떻게 홍보할지 등 사업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전략을 만들고 있습니다. 제 직속 상사는 경영진들입니다. 그리고 제가 조직에서 직간접적으로 관리하는 구성원들은 20여 명이 됩니다.

최근에는 실무 작업보다는 리더 역할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목표를 제시하고, 진행 상황을 보고 받고, 필요한 의사결정을 하고, 구성원들을 동기부여하는 역할들입니다. 점차 실무자에서 리더로 중심이 옮겨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사실 이 같은 변화가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리더십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이 리더가 되었고, 개인주의적인 제 성향이 구성원들이 기대하는 리더의 모습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리더로서 역할 수행이 장기적으로 제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가치관 중 두 가지인 '자유'와 '적자생존'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리더로서 역량과 경험을 쌓으면 향후에 제가 수행할 수 있는 역할 범위가 넓어질 수 있고, 또한 제너럴리스트로서의 다양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한 가지 가치관인 '자연'과는 상충하는 면이 있습니다. 저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적은 편인데, 리더 역할을 원활히 수행하려면 구성원과 조직에서 일어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향후 선택지를 넓히기 위한 배움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훈련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가끔 창업해야겠다는 말을 하는데,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장으로서 경제적 책임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 말은 계속해서 사회에서 필요한 역량을 쌓아가면서, 어느 순간 창업도 고려해 볼만한 선택지를 만들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시점은 지금으로서는 특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년이 될 수도 있고, 20년 뒤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창업을 언제 하든 경제적으로 걱정하지 않도록 책임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2. 유대적 책임 

경제적 책임에 비해 유대적 책임은 앞으로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회사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하고, 함께 있더라도 적극적으로 교감하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내가 함께하는 시간에서 사랑을 느끼고, 소소한 대화를 통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더욱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자 아빠로서 유대적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먼저 가능한 최선을 다해 집에 일찍 들어오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회사 일을 제외하고는 다른 목적으로 시간을 쓰는 일을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취미 생활도 따로 하지 않고, 인맥 관리도 따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깥에서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제가 집에 일찍 와야 아내가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노력은 하지만 실상은 같이 집에서 저녁을 먹은 지가 언제인지 저도 까마득합니다. 올해에는 회사 미팅 시간을 줄여서 늦어도 저녁 7시 30분 전에는 집에 오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또 다른 노력은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평일에는 아내가 아이와 시간을 주로 보내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제가 평일에는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재우기 전에 목욕시키는 게 거의 전부입니다. 적어도 주말에는 아이와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우리 아이도 아빠와 여행을 다니기에 익숙해진 듯 하니 1박 2일로 여행도 자주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가장 부족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면서, 올해에 가장 바뀌고 싶은 부분입니다. 아내의 소소한 수다에 더 친절한 관심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하는 데에 왕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을 쌓고, 대화를 많이 나누고, 깊은 고민을 털어놓고, 때로는 의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관계는 깊어진다고 믿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책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책임이 저를 믿고 인생을 함께하기로 결심한 아내를 사랑하는 일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겠습니다.

3. 존재적 책임

우리 아이의 이름은 '큰 울타리 안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의미로 지었다는 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고, 저 스스로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는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아직은 제 울타리가 너무 좁습니다. 기껏해야 제 자신을 넘어 아내와 우리 아이까지 셋을 겨우 포괄하는 정도입니다.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상황과 마음까지 공감하기 위한 노력들을 지속해야겠습니다. 이 과정을 어떻게 함께 해 나갈 수 있을지 같이 고민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올해 소소하지만 개인 목표를 두 가지 세웠습니다. 첫째는 책 100권 읽기이고, 둘째는 그동안 작성했던 육아일기를 출판하기입니다. 두 가지 모두 제 자신이 더 나은 사람으로 성숙해 간다는 면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닫는 말>

저와 인생을 함께 해주신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같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지려고 노력해야 비로소 가족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식 전날에 제가 변할까 봐 불안해하던 아내의 목소리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때 전화기 너머로 불안해하던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했던 말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나를 당신에게 보낸 이유는 나를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나를 믿기보다는 당신이 믿는 신을 믿고 나와 결혼해 달라." 지금도 그 변화는 진행 중입니다. 앞으로 변화해 나갈 모습도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