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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전공의가 본 시리즈 <중증외상센터>

by 파랑고래


넷플릭스 시리즈 <중증외상센터>를 보면서 마음이 참 편치 않았다. 드라마가 아닌 진짜 '중증외상센터'에서 근무한 경험 때문이었다.


내가 공부했던 학교에는, 이국종 교수님이 계셨다. 학생들에게 참 무서웠기에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외상외과에 대한 그분의 열정은 진심이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어느새 병원과 의대 건물 사이에는 닥터헬기가 내릴 수 있는 헬기장이 생겼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헬기장의 크기는 점차 넓어져 갔고, 내가 인턴으로 근무할 무렵에는 옥상에도 큰 헬기장이 추가가 되었다. 헬기장의 크기가 마치 교수님의 열정과 비례하는 것 같았다.


이국종 교수님의 열정과 성취를 보면서, 막연히 외상외과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기어코 환자를 살려내는 드라마 속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생으로 밖에서 바라본 외상센터와, 인턴으로서 안에서 겪은 외상센터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이미 치료가 가능한 시간인 골든타임(golden time)을 넘겨 도착하는 환자들이 허다했고, 이를 바라보는 의료진이 감당해야 할 피로감과 좌절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의료진의 노력으로 회복된 환자 앞에 놓인 삶은, 어쩌면 수술 과정보다 더욱 참혹했다. 택배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던 분은 양쪽 다리가 절단된 채 사고비용 청구서를 받아야 했고, 한 가정의 듬직했던 가장은 뇌 손상으로 인해 더 이상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드라마 속 이야기는 현실에서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나는 외과의사의 한계를 느꼈고, 보다 궁극적으로 환자의 삶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외상센터에서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는 것보다, 삶에 무게에 짓눌린 환자들이 외상센터로 이송되는 일을 막고 싶었다. 결국 정신건강의학과를 가기로 결정했다.





외과에서 정신과로 전향한 나의 선택에 많은 교수님과 동기들이 의아에 했다. 양극단에 서있는 반대의 과를 선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정신건강의학과와 외상외과는 참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외상센터에는 수많은 자살 시도 환자들이 내원한다. 자살시도로 고층에서 떨어져 뼈가 부러지고, 그 부러진 뼈가 살을 뚫고 나온다. 여러 군데 스스로를 향해 찌른 상처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넘친다. 나는 이 모습이, 안에서 곪을 데로 곪아버린 환자의 마음이 결국 밖으로 터져 나온 것처럼 보였다.


외상 환자들이 외상성 기흉*으로 인해 숨을 못 쉬고, 심장막에 혈액이 가득 차 가슴이 조여 가는 고통을 동일하게 정신과 환자 역시 느낀다. 심지어 의식이 또렷이 있는 상태로 말이다.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외상환자와 좌절감에 압도되어 죽음의 문턱에 서있는 정신과 환자는 결코 다르지 않다. 몸의 상처로 인한 출혈로 의식을 잃어가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에서 새어 나오는,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출혈은 서서히 한 개인의 영혼을 잠식시켜 간다.


환자들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마음의 상처를 봉합하기 위해 정신과에 내원한다. 약물과 주사 치료로 대량 출혈을 막으며 응급상황은 지나갈 수 있으나, '수술 끝!'이라 외치는 백강혁 교수처럼 갑작스럽게 모든 생체 징후가 안정화되는 기적은, 안타깝게도 정신과에선 나타나지 않는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와 한 팀이 되어 수술을 시작한다. 마취과 의사도, 간호사도 없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기계도 없다. 조용한 진료실에서 오직 환자와 정신과 의사 둘 뿐이다. 정신과에서의 수술은 폐엽절제술(lobectomy), 간절제술(hepatectomy) 같은 무시무시한 명칭도 없다. 지지적 정신치료(supportive psychotherapy)와 정신분석(psychoanalysis)이란 다소 난해한 용어로 명명된다.


외상에 의한 출혈은 장기 손상에 따른 증상이다. 따라서 출혈의 근본 원인인 장기의 상처를 찾아 봉합하는 것이 궁극적인 치료이다. 이와 같이 정신과에서 환자가 호소하는 우울, 불안, 무기력은 겉으로 드러난 증상일 뿐이다. 그 증상을 야기하는 마음의 상처를 찾아 봉합해야 하지만, 이는 '무의식'이라는 깊고 어두운 내면의 공간에 숨겨져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수술 시간은 예상할 수 없다. 드라마 수술 시간처럼 1시간 반 만에 끝나는 정신과 치료는 없다. 양재원 의사가 석션*을 해가며 출혈의 근원을 찾아가듯, 환자와 함께 컴컴한 무의식을 탐험해 가며 고통의 근원을 찾는다. 환자와 함께하는 힘든 시간은 오롯이 날카로운 메스*가 되어 환자의 마음을 한 겹씩 열어볼 수 있게 해 준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마음의 상처에 도달했다면, 안타깝지만 그 지점까지가 의사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다. 상처를 꿰매는 일은 환자 스스로의 몫이다. 그때부터 정신과 의사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환자 스스로 집도를 할 수 있도록 보조한다. 상처에서 피가 다시 새어 나오면 진심 어린 공감으로 지혈 해드리고,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 마음의 활력이 떨어질 때면, 그 과정을 버틸 수 있도록 약물을 건네어 드린다.


끝내 환자가 멋지게 상처를 봉합하여 '끝!'을 외칠 때면, 진심으로 함께 기뻐한다. 이는 정신과 의사로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이다. 결국 상처를 봉합하고 아물게 하는 건 환자 자신이다. 정신과 의사는 그때까지 환자 옆을 묵묵히 지키며 함께 견뎌낼 뿐이다. 환자분들을 알고 계실까. 마음속 너무나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그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천재 의사 백강혁' 또한 내 안에 있다는 것을.


환자와 함께 길고 긴 시간을 버틸 수 있도록 오늘도 정진해야겠다.




외상성 기흉* :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흉부에 상처가 생겨 폐가 손상되어 발생하는 질환

석션* : 혈액이나 가래, 이물질 등을 흡인하는 행위, 기계

메스* : 수술, 해부 등에 쓰이는 작고 날카로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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