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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by 파랑고래

저는 정신건강의학을 전공하고 있는 전공의입니다.

'전공의'라는 단어가 생소하신 분들을 위하여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국가고시를 통과하게 되면 '일반의 (General Practitioner)'가 됩니다.

이후 한 분야에 보다 전문적인 의사가 되고 싶을 경우에는, 수련병원에서 4-5년의 수련 과정을 거친 뒤 '전문의(Medical specialist)가 됩니다. 수련병원에서 수련을 거치는 과정에 있는 의사를 '전공의(resident)'라고 합니다. Resisdent 하면'거주자'라는 뜻을 쉽게 떠올리셨을 텐데요, 네 맞습니다.. 병원에서 거의 퇴근을 하지 않은 채 '거주'하며 전공을 수련한다는 의미이지요.


호기롭게 시작했던 정신과 수련 과정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수많은 종류의 약들의 효과와 부작용, 복잡한 기능이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뇌 회로,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정신분석의 이론 등, 막대한 양의 공부를 소화해야 하는 것이 참 버거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마음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계시는 환자분들을 도울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을 때입니다. 1년 차 시절 제 스스로 치료를 잘 마무리했다고 자부했던 환자 분께서, 퇴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살 목적으로 약을 다량으로 복용하신 후 응급실에 내원하셨습니다. 놀란 마음으로 환자분에게 면담을 하러 응급실로 뛰어갔습니다. 환자분께서 저를 보고 반가워하시더니, 겸연쩍게 웃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기 전에 얼굴 한번 보러 왔어요 선생님."


정신없는 응급실의 소음이 들리지 않고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정신과 병동 안에서 최신의 약을 복용하고 오랜 기간 상담치료를 진행하여도, 결국 환자분이 마주쳐야 하는 세상은 병동 밖에 있다는 걸. 그 세상에서 버티고 싸우는 일은 정신과 의사가 대신해드릴 수 없다는 걸.


그 뒤로 참 많은 고민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정신 의학이 환자분께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환자분이 세상의 무게에 버거워하시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것 밖에 없는 것일까.


3년간의 수련 과정을 거치며, 이 질문에 대해 제가 내린 결론은 '환자분이 마음을 관찰하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는 것'입니다. 꾸준하고 세심하게 마음을 관찰해 나아가다 보면 마음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폭이 확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단단한 힘이 서서히 피어오릅니다. 이 힘은 내가 감정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고, 결국 '나를 위한 옳은 선택'을 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힘을 정신의학에서는 '자존감(self esteem)'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을 여러 관점으로 관찰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마음을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길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신과 전공의로서 인터넷 공간에 글을 남긴다는 것이 참 조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이 힘든 시간을 버티고 계시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하려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제 스스로의 수련을 위하여 연재를 하고자 합니다. 저의 생각을 정리하고 나누는 것 역시 정신과 수련의 한 과정이지 않을까요.


'세상만사'라는 말이 무색하게 하루에도 만 개가 넘는 무수한 사건들이 쏟아지는 요즘입니다. 많이 미숙하겠지만, 정신과 전공의로써 제 글이 독자 분들의 시선을 좀 더 다채롭게 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4.1

파랑고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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