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정신과 전공의가 본 '할머니 순댓국'

by 파랑고래

여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후였다.

나도 이제 아저씨가 돼 가는 건지, 뜨끈한 순댓국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길을 잠시 멈추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안내판을 보니 '신당역'이라고 적혀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근처 맛집을 검색해보니 정감 가는 상호명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순댓국'


가게 리뷰는 더욱 정감이 갔다.


'순댓국 4000원. 카드, 계좌이체 안되니 현금 준비할 것'


근처 ATM에서 돈만원을 출금 한 뒤, 우산 속 인파를 지나 가게로 향했다.

가격 때문인지 돈을 찾는 수고로움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게를 향해 나있는 굽이굽이 나있는 좁은 길을 보면서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골목길이 떠올랐다.


추억에 잠겨 갈 때쯤 어느덧 가게에 도착했다.

커다란 가마솥에 보글보글 고기가 삶아지고 있었다.

가게 안은 이미 어르신들로 만원이었고 밖에는 어르신 두 분이 웨이팅을 하고 계셨다.

입구에서 인상 좋으신 주인 할머니가 연신 고깃 국물을 뒤적이고 계셨다.

뽀얀 국물 위로 녹진한 돼지고기 냄새가 피어올랐다.


웨이팅 손님들은 단골이신 것 같았다. 할머니와 넉살 맞게 이야기를 주고받으셨다.

할머니는 며칠 전 꾸셨던 신기한 꿈 애기를 풀어주셨다. 할머니의 '말씀의 맛'은 오래된 가게 연식만큼 깊이가 있었다. 어느샌가 나도 할머니의 이야기에 점점 귀 기울이게 되었고, 할머니는 나에게도 눈을 맞추시며 열심히 꿈이야기를 하셨다. 비 오는 날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할머니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 이 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맛깔난 할머님의 언변 덕분에, 짧았던 웨이팅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가게는 작고 허름했지만 정갈한 느낌이 들었다. 또 다른 할머니 분들이 위풍당당하게 나를 맞아주셨다.

마치 맛집을 지키는 '전사' 같으셨다.


"가방 저기 걸고 절로 쑥~ 들어가 앉아"


사람이 많은 관계로 혼자 온 나는 자연스럽게 건장한 남성 분과 합석을 하게 되었다.

단골의 포스가 느껴진 그분은, 합석이 당연하다는 듯 개의치 않고 국밥에 집중하셨다.

혹시 반찬도 같이 먹는 건지 걱정됐지만, 다행히 '전사 할머니'께서 따로 내어 주셨다


"뭐 먹을껴?"


"아.. 순댓국이랑요 고기 한 접시요"


"삼천 원? 오천 원?"


"네?"


"뭔 고기 먹을 거냐고? 오천 원?"


"아.. 네! 그거 주세요"


정신없이 주문을 마치고 한숨 돌렸을 때 너무 싼 가격에 오히려 당혹감이 느껴졌다.

고기 한 접시가 오천 원이라고? 요즘 같은 물가에?

놀라움을 느낄 새도 없이 내 앞에 푸짐한 한상이 차려졌다.


순대국 3000원, 고기 5000원 이다. 말이 되는 가격인가.



푸짐한 고기에 배를 채우고 뜨끈한 국물로 몸을 녹이고 나니 이제야 가게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70대 정도 돼 보이시는 어르신들이 가게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상에는 돼지 국밥 한 그릇과 막걸리들이 놓여 있었다.

평일 오후에, 가격 부담 없는 인심 좋은 가게에서 술 한잔 기울이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어르신들..

지팡이를 짚으며 가게에 오신 할머니에게 '비 오는데 집에서 쉬지 왜 왔냐' 며 타박을 하시다가도,

이내 순댓국에 고기 듬뿍 담아 주시며 단백질을 챙겨 먹으라는 주인 할머니.


병원에서 보던 노인분들의 모습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정신과 병동에서, 외래에서 내가 뵈었던 노인분들은 주로 인지기능의 저하를 보이시는 분들이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으셔서 자주 목소리를 높여 문진해야 했고, 항상 병동에서 낙상하시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곤 하였다. 한없이 약해 보였던 병원 안의 어르신들 모습과 달리, 병원 밖 어르신들의 삶은 여전히 역동적이고 정감 있게 느껴졌다.


할머니 순댓국에는 고기만 푸짐하게 담겨 있는 게 아니었다. 다사 다산했던 한국의 역사를 감내하신 어르신들의 삶이 진하게 담겨 있었다.


가게를 나서며 앞으로도 진료실 밖 사람들의 삶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참 든든한 한 끼였다.



이름 없는 노트북 (2)-26 (1).jpg



keyword
이전 10화정신과 전공의가 본  영화 <애드 아스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