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빙고동은 서울시 용산구에 위치해 있다. 이태원, 그리고 이태원의 확장판이라 불리는 보광동의 이웃 동네이다. 하지만 검색을 해도 동빙고동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나와있지 않다. 나름 알려져 있는 이웃 동네들을 고려하면 이상할 정도로.
한강이 보인다고 하면 이미 잽싸게 개발되어 고급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서울에서, 동빙고동은 한강을 마주하는 얼마 남지 않은 옛 동네이다. 아파트, 고급 빌라, 다세대 주택이 공존하지만, 한강을 마주보는 곳은 모두 낡은 다세대 주택이다. 꼬불꼬불 골목길과 언덕길, 한옷집, 오래된 슈퍼와 분식집 등 서울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한강 다리만 건너면 고급 아파트가 즐비한 반포동이 나오고, 이 동네에서도 이태원쪽으로 올라가면 고급 빌라 주택과 대사관들이 나온다. 과거와 현재가 미묘하게 공존하는 곳이다.
이태원이나 보광동처럼 딱히 방문자들을 끄는 장소는 없었지만, 생활에 필요한 것은 모두 있었다. 무엇보다, 방에서 저 멀리 한강이 보이고, 옥상에 올라가면 반포대교에서의 불꽃놀이를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었으니, 많은 것이 필요 없었다. 대부분의 음식은 요리해 먹었지만, 집 뒤 언덕에 위치해 있는 동네 피자집이 꽤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 곳을 아지트 삼은 외국인들이 있었던지, 주말마다 영어로 시끌시끌해지는 조그만한 동네 바와 외국인이 일하는 세련된 카페가 있었다.
낡은 집들이 많은 곳답게, 길고양이들이 많았다. 그 중에 검은색 고양이와 갈색 고양이는 햇살 좋은 날이면 항상 집 밖 화단에서 조용히 낮잠을 자곤 했다. 나도 햇살 좋은 날이면, 옥상에 올라가 맥주 한 캔에 책 하나 가지고 의자에 않아서, 한강과 저 멀리 보이는 관악산을 보면서 광합성을 하곤 했다. 이 것이 행복이지, 뭐 다른 것이 필요했겠는가.
이 집을 보러 동빙고동에 처음 온 날은, 코가 벌게지게 추웠던 영하 10도의 한 겨울날이었다. 이 집에 살던 사람은 한국에서 10년 동안 살고 있었던 미국인이었다. 추운 날씨였지만, 그는 정성스레 구석구석 동네 투어를 시켜주었다. 교통편이 불편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옥상에서의 야경을 봤을 때 이 집에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태국에서 만난 그에게 마음을 빼았겼듯이.
이 곳에 살게 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휴가지에서 만난 우리는 단 하루를 함께 했지만, 서로에 대한 이상한 확신이 있었으며, 같이 살아보기로 했다. '미친 짓이야'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에 쏙 드는 집까지 나타났으니 '한번 해보지 뭐'라는 생각으로 실행했다.
분당으로 기나긴 출퇴근을 해야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는 집이 있는 것이 행복했었다. 그는 나를 깨워주었고, 내가 샤워할때 토스트를 만들어 놓았다. 그를 두고 회사에 가는 것이 슬펐지만, 이렇게 매일 얼굴을 보는 것만 해도 만족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같이 살게 되었지만, 크게 싸우지 않고 잘 지냈었다. 그가 요리를 하면 나는 설거지를 하고, 집안일과 생활 비용은 1:1로 나누었다. 아직 서로를 알아가는 때였기에, 오히려 최대한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이 좋았다.
그런 동안 일 계약이 만료되었고, 그의 비자 만료일도 나가왔다. 두 방랑자들은 더 따뜻한 곳으로 가기로 했다. 매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초여름 즈음, 우리들은 가방을 싸고 동빙고동을 떠났다.
벌써 1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와 나의 관계는 끝났고, 동빙고동도 재개발 지역으로 언젠가는 새 아파트들이 들어설 예정이다.
어자피 영원한 것은 없지 않는가.
영원한 것은 사진, 그리고 추억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