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이곳을 지날 때 곤양천 방둑에 설치된 ‘ㄱㅣㅁㄷㅗㅇㄹㅣ’라는 빨간 조형물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그 무렵, 멀지 않은 곳에 김동리와 인연이 깊은 절 다솔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문득 이 근방에 김동리의 문학 공간이 있겠거니 짐작만 하고는 지나친 기억이 있다.
오늘은 편에게 단독 외출 허락을 받고 차를 몰아 이곳에 다시 왔다. 곤명농협에 차를 세운 뒤, 조형물이 있는 방둑으로 향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한글 조형물은 ‘김동리 학원 가는 길’의 도착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곳은 경남 사천시 곤명면 봉계리, 곤명농협 앞 곤양천 방둑이다. 작가 김동리는 20대 시절, 다솔사를 숙소 삼아 광명학원이 있는 봉계마을까지 이 10리 길을 걸어 다녔다고 한다.
다솔사는 우리나라 다도 문화의 중요한 중심지 중 하나다. 절 뒤편의 차밭은 ‘반야차로’라 불렸고, 이로 인해 다솔사는 '다사(茶寺)'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주지였던 최범술은 우리나라 최초의 다도 개론서인 『한국의 다도』를 집필했다.
또한, 다솔사는 만해 한용운, 주지 최범술, 불교학자 김법린, 그리고 불교철학을 연구하며 교육에 헌신한 김동리의 형 김범부 등이 은거하며 독립운동을 펼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김동리는 20대에 이곳에 내려와 11년간 머물렀다.
광명학원은 1937년, 다솔사의 최범술 주지가 설립한 사설 교육기관이다. 김동리는 이곳에서 교편을 잡으며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일본의 기미가요와 군가를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리고 일제가 세운 인근 소학교보다 더 많은 학생 수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감시를 받았고, 결국 학원은 1942년에 강제 폐쇄되었다.
그 후 김동리는 징용 영장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만주 등지를 방랑하다가 하동의 후배 집에 은거했다. 이 시기,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한 소설 『역마』를 구상했고, 이후 사천읍에서 양곡을 배달하다가 해방 후인 1946년에 서울로 이사했다.
김동리는 다솔사에 머무는 동안 『등신불』, 『을화』, 『역마』 등 대표작을 썼다고 한다. 이들 작품은 사천 일대, 곧 곤명면 봉계리나 서포면 해안가에서 채집한 무속적 자료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등신불』은 다솔사를 배경으로 하며, 『을화』는 1981년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었다.
광명학원이 폐교되기 전까지 6년 동안, 그는 매일같이 이 길을 오가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이 길은 작가의 문학적 여정이 깃든 ‘김동리 학원 가던 길’이 되었다.
오늘 나는 그 ‘김동리 길’을 혼자 걸었다. 예전처럼 편과 함께 걷는 길이 아니었기에, 더 많은 생각이 들었고 사유도 깊어졌다. 김동리와 그의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사실 나는 그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는 않다.
『역마』는 화개장터를 무대로 하기에 비교적 기억에 남아 있지만, 『등신불』과 『사반의 십자가』는 젊은 시절에 읽었어도 내용은 희미하다. 청소년 시절, 김동리 외에도 황순원, 박경리 같은 작가들을 접했지만, 그의 작품을 더 자주 접한 건 아니었다.
오늘 내가 걸은 이 길은 ‘김동리 학원 가는 길’을 역방향으로 걷는 셈이었고, 다솔사에서 시작되는 10리 중 절반도 채 못 되는 방둑 길뿐이었다. 그럼에도 곤양천의 맑은 물과 그 물소리, 줄지어 선 겨울 나목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나를 슈베르트의 고독한 ‘겨울 나그네’가 아니라, 겨울 햇살 속 여유로운 나그네로 만들어주었다.
물을 가로막은 보(湺)에 이르자 물소리가 커졌고, 옆 절벽은 진주 남강의 뒤벼리나 새벼리보다는 작지만, 그 자체로도 충분한 운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 길을 걸은 계기로 나는 김동리와 그의 문학 세계를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둑길 위로 들려오는 물소리, 그 물을 차고 오르는 청둥오리와 백로의 날갯짓 소리는 겨울 방둑 걷기의 또 다른 멋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 지역엔 걷기 좋은 길이 많지만, 집으로 돌아와 편에게 이 길을 함께 걸어보자고 제안했다. 다만, 편은 선뜻 그러자고 대답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