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만은 빨갛게

081231 비오롱과 '만추' 악보

by 로댄힐

08년 마지막 날, 기분이 좀 이상해진다. 뭔가를 정리해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들고.


‘가을의 노래’


뜬금없이 ‘비오롱’이 떠오른다. 비오롱과 함께 추은희도 따라 떠오른다. 고등학교 시절, 깊은 가을이었다고 치자. 어느 책에서 추은희의 소개로 읽은 불란서 시인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 나는 그 시를 통해 처음 ‘비오롱’이라는 개념을 얻었다.


가을날 / 비오롱의 / 서글픈 소리 / 하염없이 / 타는 마음 / 울려 주누나 / 종소리 / 가슴 막혀 / 창백한 얼굴 / 지나간 날 / 그리며 / 눈물짓는다 / 쇠잔한 / 나의 신세 / 바람에 불려 / 이곳저곳 / 휘날리는 / 낙엽이런가.


그래서 한동안 나는 이 번역이 추은희의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확인해 보니, 이 시의 번역자는 전봉래라는 분이었다.


전봉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1923년 평남 안주에서 태어나 동경 유학을 마치고 광복 직전 귀국했다. 소년 시절 철봉 사고로 척추를 다쳤고,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을 전공하며 그 계열의 작품을 여러 편 번역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부산으로 피난했지만, 28세 되던 해 다방 ‘밀다원’에서 바흐 음악을 들으며 수면제를 음독했고, 곧 거리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남긴 유서와 자살 소식은 피난 문단에 큰 충격을 던졌다고 한다. 베를렌의 생애 또한 비참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무튼, 감수성 예민하던 고등학생 시절, 추은희와 함께 접했기에 내게 ‘가을의 노래’는 여전히 ‘추은희의 시’로 남아 있다.


1944년 6월, 제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를 알리기 위해 연합군은 영국 BBC 방송을 통해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 첫 세 행을 반복해 내보냈다고 한다. 그것은 프랑스 레지스탕스에게 “그날이 왔다”는 신호였다.


겨울인데도 페이브먼트 위 낙엽들은 바람 따라 우르르 몰려다닌다. 마지막 몸부림인 듯하다. 아직 나무에는 더 떨어질 잎사귀들이 남아 있는가.


비오롱


베를렌의 시 속에 나온 ‘비오롱’. 나는 지금도 ‘바이올린’보다는 ‘비오롱’이라는 이름에 더 끌린다.


바이올린의 프랑스어 발음인 ‘비오롱(violon)’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여러 음악 용어와 함께 우리 곁에 들어왔다. 그 무렵 사람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단조로운 선율 속에서 잠시 삶의 고단함을 잊었고, 또다시 그 고단함을 깊이 깨닫곤 했다. 그래서 비오롱은 투박하지만 정겨운 악기, 그 시대의 정서를 담은 이름이었다.


비오롱은 곧 그 시대의 초상이었다. 팍팍한 삶의 현장에서 삐걱거리듯 이어지던 선율, 그러나 그 속에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작은 몸부림이 깃들어 있었다. 종소리처럼 퍼져나가는 음색은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 같은 나약함을 드러내면서도, 언젠가 다시 봄을 맞으리라는 위안까지 함께 전해 주었다.


그 소리는 단지 악기의 음색이 아니었다. 가난과 그리움, 희망과 체념이 얽힌 삶의 선율이었다. 낯설면서도 친숙했던 이름 ‘비오롱’, 그것은 우리 모두의 지난날을 울려 주던 작은 현악기였다.


세월이 흘러 다시 바이올린 소리를 들을 때면, 내 귀에는 여전히 ‘비오롱’의 울림이 겹쳐온다. 다듬어지지 않은 선율 속에서도 삶을 버티게 하던 따뜻한 숨결, 그것이 바로 그 시절 우리가, 그리고 내가 품었던 비오롱의 음색이었다.


새로운 한 대의 획을 그은


끝 지점에 서면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출발선에서 앞을 내다보려는 마음과 같지만, 앞을 바라볼 때 보이는 것보다 돌아볼 때 보이는 것이 더 구체적이고, 더 많은 갈래를 품고 있다.


2008년의 내 발걸음을 돌아본다. 그곳에는 여러 걸음, 걸음걸음의 흔적들이 있다. ‘관계 속의 나’로서 남긴 발자취도 있고, ‘나, 그냥 나, 나는 나’로서 남긴 흔적도 있다. 그것들은 모래 위 발자국처럼 때로는 범벅이 되어 섞여 있고, 때로는 긴 행렬을 이루며 이어져 있다.


10대, 20대, 30대, 그렇게 단순히 나이를 구분하던 표식이 이제는 60대라는 새로운 획을 그었다. 이해 08년, 하노라고 하면서 살았다. 하지 못한 것도 있고 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하면서 살았다.


혼자 세어 본 별밤도 많았다. 원고를 넘기지 못한 채 해를 보내게 된 것은 아쉬움이지만, 그렇다고 큰 아쉬움은 아니다. 남기는 것(having)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것(being)이 중요한 법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고, 이렇게 ‘있고’ 있다.


진정으로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은


나의 한 대(代) 획을 그으면서 그리고 또 한 해를 보내면서 소로의 다음 말로 나의 삶을 가늠한다.


“산을 오르는 일이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 자세히 적어 보십시오. 몇 번이고 고치다가 손을 놓고 충분히 쉰 후 뭔가 확실한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 그때의 감동을 되새기며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당신이 산의 정상을 다녀왔다면 거기서 무엇을 보았나요? 그곳에 올라가 잠시 바람을 맞고 내려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작 산에 있는 동안 우리는 산을 오르지 않습니다. 그저 집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점심을 먹거나 할 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은 집에 도착한 후의 일입니다. 산이 무슨 말을 하던가? 산이 어떻게 하던가?” (소로 /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중)


과일만은 빨갛게


해를 보내며 나는 하나의 매듭을 짓는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은 여운은 이만희 감독 영화 만추의 장면들과 그 장면 위로 흐르던 음악이다. 만추와 비슷한 분위기의 또 다른 영화가 있었는데, 제목을 끝내 기억해내지 못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종이에 적어두지 않은 탓에 놓쳐버렸다. 언젠가는 ‘맞다, 이거구나!’ 하며 무릎을 칠 순간이 올 것이다. 꿰뚫는 직관의 일은 미루어둘 수밖에 없다.


영화는 볼 때 영화이고, 음악은 들을 때 음악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보게 되고 듣게 되는 것은 그 순간이 아니라, 보고 듣고 난 후 오랫동안 반추할 때임을 조금씩 깨달아 간다. 체험이란 원래 그런 것일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음미하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다”는 말도, 선사들이 말한 깨달음 또한 그 맥락이리라. 소로 "진정으로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은 집에 도착한 후의 일"이라고 한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일 것이라고 여긴다.


나는 오래도록 만추의 음악을 품고 살았다. 그러다 5년 전, 대중음악 평론가 박성서 님을 통해 드디어 그 음악 파일을 받게 되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테마뮤직은 내 오랜 여운과 정확히 일치했다. 다만 가사가 있는 주제가는 그때 처음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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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이 곡을 직접 악보로 옮겨볼까도 했지만,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또 몇 해가 흘렀다.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수색의 왈츠’는 어렵사리 악보를 찾아 색소폰 악보로 만들었지만, 만추의 악보만은 끝내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었다. 색소폰 악보를 잘 만드는 지인에게 음원을 들려주고 채보를 부탁했다. 그는 채보는 처음이라 했지만, 듣고 또 듣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가사가 있는 주제곡 악보를 완성해 주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가사가 없는 테마뮤직은 여전히 듣고 있다고 했으니, 언젠가 건네받게 되리라 믿는다. 하지만, 이 악보는 언제 건네받을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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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나는 마침내 ‘만추 주제가’ 악보를 손에 넣었다. 이것이 2008년의 마지막에 남긴, 작지만 내겐 특별한 결실이다.


그리고 내내 마음을 붙잡는 구절이 있다.


“가랑잎은 말없이 지고 또 져도 과일만은 빨갛게 빨갛게 과일만은 익네. 과일만은 익네.”


떨어져 사라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남아 붉게 익어가는 것도 있다. 쓸쓸히 흩날리는 낙엽 속에서도, 땅을 향해 기운을 다하는 과일은 빛을 머금고 붉게 영글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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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돌아보니, 내 삶 또한 그렇게 지고 익어가는 과정 속에 놓여 있다. 스러짐이 있기에 완숙함이 있고, 소멸이 있기에 다음의 시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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