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개미취 자리엔 이제 국화가

(지난가을의 수채화 그 하나 - 사람, 서울 사람)

by 로댄힐

벌개미취가 지고 국화가 피었다. 벌개미취가 물러나니 그 자리가 국화의 자리로 된 것이다. 하순으로 접어드는 11월 지금, 국화도 조금씩 시들시들해진다. 무서리가 스쳐 가고 된서리가 오니 서리의 철 국화도 힘이 빠지는가 보다.


개미취, 꽃대에 개미가 붙어 있는 것처럼 작은 털이 많다 하여, 개미가 취할 정도로 좋아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실제로 개미취 주변에는 항상 개미가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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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개미취, 벌판에서 자라는 꽃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벌개미취는 우리나라 들꽃으로는 처음 원예화에 성공한 야생화. 벌개미취는 ‘koraiensis’라는 종소명(種小名)을 가지고 있어 우리나라에만 분포하는 특산종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벌개미취라는 우리 이름은 ‘취’자가 붙은 다른 초본식물과 마찬가지로 국을 끓이면 미역국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개미취나 쑥부쟁이는 헛갈리기 쉽다. 그런데 벌개미취는 다른 종류와는 달리 꽃의 지름이 4∼5센티미터 정도로 크고, 꽃이 피기 전까지는 뿌리에서 올라온 긴 타원형의 잎, 즉 근엽(根葉)이 발달해 있어 쉽게 구별된다. 벌개미취는 키워보니 번식력이 아주 강하다. 벌개미취의 꽃말은 ‘너를 잊지 않으리’ 또는 ‘추억’이라고 한다. (식물학자인 유기억의 야생화 이야기에서 벌개미취에 관한 지식을 익힘)


참 오래전이다. 2009년 초여름으로 기억된다. 바위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승용차 한 대가 올라왔다. 남녀가 내려, 일하고 있는 내게로 와 이것저것 묻는다. 서울에 살며 산을 좋아한다고 했다. 산 중에도 지리산, 그중에도 악양 지리산에 필이 꽂혀 인연 맺을 땅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왔다고 했다. 마침 우리 밭 아래의 밭이 매물로 나와 있었는데 그 아래 밭에 관한 거, 물어볼 만한 것은 다 물어봤고 나 또한 대답할 만한 것은 다 대답했다. 이제 돌아가려니 했지만 계속 서서 뭔가를 계속 더 물어볼 눈치다.


드디어 실토, 실토 아닌 실토를 한다. 사실은 선생님의 블로그에서 악양 생활에 관한 글과 사진을 꾸준히 읽고 또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면소재지에서 땅을 안내하는 사람에게 악양 동매마을의 땅을 소개해달라고 요구했더니 이곳을 알려 주더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산 중에서도 지리산을 좋아하고, 지리산 중에도 악양 지리산을 좋아해서 인연을 맺으려 하고 있던 차에 나의 블로그에서 소개되는 악양 살이 글과 사진이 그들의 악양 행 결심을 굳히는데 약간의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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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간 후 곧 다시 왔다. 이번엔 아래 밭의 주인이 되어 왔다. 그리고 그 후 지금까지 서울에서 부지런히 내려왔다. 한 달에 두 번, 못 내려와도 두 달에 세 번은 내려오는 것 같았다. 내려와서는 정말 부지런히 일했고 악양 이곳의 산하를 즐기는 것 같았다. 두 분이 일하다가 쉬는 시간에 자기네 컨테이너 하우스 데크의 파라솔 아래 안락의자에 앉아 들판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나 또는 스테이크 구워 먹는 모습은 보는 나의 눈을 즐겁게 했다. 사실 악양 지리산과 섬진강 또 평야는 내가 지금 그 가운데 머물러 있는 중에도 보고 싶고 그리운 곳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그 내외의 발길이 뜸했다. 바깥 분이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 후 다른 일을 하는 것 같았지만 난 물어보지 않았다. 퇴직 후 하게 된 일이 무척 바쁜 일이어서 자주 내려올 수 없다고 했다. 새로 시작하게 된 일이 무ㅠ엇인지 짐작이 갔지만 난 또한 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래 밭을 보러 오기 시작했다. 매물로 내어 놓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두 분이 마지막으로 내려왔다. 10여 년 땀 흘리고 즐긴 땅, 자기네 밭이 팔렸다고 했다. 이틀 동안 머물면서 컨테이너 농막의 짐을 정리하고 가져갈 것은 차에 실은 후 올라왔다. 차 한 잔 달라고 했다. 가제보, 전망대 같은 우리 정자에 넷이 마주 앉았다. 아래위 밭에 그러니까 어쩌면 같은 공간에서 10여 년 동안 함께 머물렀으면서도 두서너번 말고는 우린 변변한 밥 한 그릇, 차 한 잔 나누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먼 길을 달려와 바삐 올라가야 하기에 시간이 없었다는 거 딱 그거 한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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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차 한 잔을 나누면서 안댁은 아래의 자기네 밭과(이제는 남의 밭) 악양 평야를 더 자주 봤다. 그것도 애틋한 눈빛으로. 어쩔 수 없어 이 땅과 인연을 끊지만 그동안 쌓인 정은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 다시 봐도 이런 경치, 이런 풍경은 다른 어느 곳에 없다고…. 그러고는 “10여 년 전의 교수님 블로그 악양 글 인연”으로 여기 오게 된 것이었다고 다시 말했다. “참 좋은 곳에 잘 머물다 간다.”라고 인사하고는 떠났다. 그렇게 말하는 음성과 그렇게 보는 눈빛이 애잔해 순간 나의 가슴은 갑자기 뭉클해졌다.


그분들이 떠날 때 우리 평상 바위 들개미취 자리는 국화의 자리로 막 넘어간 때였다. 벌개미취, 떠난 두 분이 아래 밭과 인연을 맺은 그다음 해에 그러니까 10여 년 전에, 서울 집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면서 건네준 거였다. 서너 포기이던 것이 번식을 거듭해 한자리를 크게 차지한 벌개미취 꽃송이들, 늦여름을 지나 얼마 전까지 한껏 피어 나의 가을을 수채화로 그려 주고는 국화에게 자리를 넘겼다.


아래 밭의 새로운 주인 내외도 인사하러 올라왔다. 이번에도 젊은 내외였는데 첫 마디가 "이런 풍경이 다른 곳에 어디 또 있겠느냐?"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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