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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색깔들


은근한 압박과 텃세가 없는 곳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보호소도 마찬가지다. 단지 개개인의 상처가 반복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외의 것들은 두 팔 벌려 다 허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가출과 아동학대, 부모의 죽음, 학교 폭력 피해, 미혼모, 스토킹 같은 단어들은 우리의 주거 공간에서는 자연스러운 생활언어다. 연령대가 나뉘어 있긴 했지만 10대들이 함께 모여있던 곳에서는 신기하게도 16살의 미혼모와 18살의 학교폭력피해는 나름 비슷한 강도처럼 느껴졌고, 그 동질감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버텼다.

“내 아픔이나 네 아픔이나 도긴개긴이야.”

보호소에서 가장 나이가 찬 형서언니가 말하면 더 어린 동생들은 도긴개긴이 뭐냐고 물었고 언니는 도토리 키재기라고 하고 웃으며 머리를 콩 때렸다.

나는 생각한다. 10대의 미친놈 마음가짐이, 10대의 충만한 그 감성들이 서로를 살린 거라고. 밥이 살린 게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살린 거라고.

은성이는 직설화법 때문에 보호소에서 종종 갈등을 유발했다. 작은 일도 거슬리면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약간의 터치가 있으면 성추행이다, 이것도 폭행이다 하며 보호소 어른들에게 대들었고 정말 그러다 뺨을 맞기도 했다. 처음이었다. 보호소 안에서 그런 험한 소리가 난 건. 뺨을 맞는 은성이의 모습이 충격적이었지만 누구 하나 같이 은성이 편을 들어주지 못한 이유는 마지막 보금자리 같이 느껴지던 이곳에서도 나가게 되면 정말 갈데없는 고아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은성이는 맞으면서도 할 말을 했다. 그래서 은성이 덕분에 어른들도 조심하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이곳에서 일어나던 교묘한 신체 접촉이나, 차별 같은 것들. 명확하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느낌으로 누구나 알고 있던 것들이 점차 줄어든 것이 난 은성이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은성이 뺨을 맞고 왼쪽 얼굴에 손자국모양 그대로 빨갛게 부은 날, 아프지 않냐고 물으며 점심 식사 후 나온 작은 두유 하나를 내밀었다.

“ 맷집하나는 내가 끝내주잖아. 언니, 이것도 단련이 된다. 언닌 맞지 마, 언닌 죽어도 맞지 마. 덜 아픈 내가 막아줄게!”

“ 뭐래. 아프겠다. 얼굴이 이게 뭐야.”

나는 차가운 물로 손을 씻고 은성이 얼굴에 가만히 가져다 댔다. 은성이는 겉으론 센 척했지만 그날 나는 분명히 봤다. 은성이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그 슬픔과 불안의 눈물을 나는 분명히 봤다.

은성이는 중학교 3학년 때 가정폭력으로 집을 가출했다. 은성이 말로는 맞고 맞다 정말 죽을 것 같을 때나 생리통 때문에 배가 아파 죽을 것 같은데 그날 맞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현관 앞에서 5분 정도 숨죽여 고민했다고 했다. 아빠가 잠들면 들어가고 작은 소음이 들리면 복도에 앉아 한없이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가끔 복도에서 엄마가 맞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동생이 우는 소리를 듣기고 했다고 했다. 너무 죄인이 된 것 같았지만 생리통이 심해서 이대로 맞으면 자궁이 터질 것 같아 무서웠다고 했다. 신기하게 아빠라는 그 남자는 은성이 배를 축구하듯 발길질했다고 했다. 생리통이 심해질 때마다 은성이는 아빠에게 맞은 배가 곪아 자궁까지 고름이 차버린 것이 아닐지 무서웠다. 사냥개처럼 아빠에게 수시로 대들면서도 막상 현관 앞에서는 들어가지 못해 마음 졸이던 은성이는 사실 누구보다 작고 여린 아이다.

엄마는 은성에게 아빠 상태가 격해지면 문자로 오늘은 조금 늦게 들어오라고 신호를 보내곤 했는데 그날은 어김없이 엄마의 얼굴에 상처가 나 있었다. 은성은 엄마의 얼굴을 보며 멍도 다양한 색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노란색, 보라색, 빨간색, 파란색, 연두색...

엄마의 얼굴은 수채화 물감으로 뒤 덮인 것 같았다. 은성의 엄마는 늘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외출했다. 그 붓고 퍼레진 얼굴로 돈을 벌러 나갈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모습을 은성이는 슬퍼했다. 우리들의 부모는 하나같이 아프고 악했고 약했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우리들은 현실에서 가정을 일으킬 힘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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