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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가장

“ 한성민!”

“... 엇 안녕.”

“ 엄마 모셔다 드리고 나와봐 궁금한 거 있어. 학교 등교시간 안 늦게 빨리 물어볼 테니까 일단 여기로 다시 와!”

“... 어.”

혼자 서있는 성민이는 이제야 평범한 학생 같았다. 교복을 입었지만 휠체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 너 범생이지.”

“ 넌 날라리지.”

“ 난 학교를 다닐 수 없는 나만의 개인적 사정이 있어. 그래도 검정고시 공부 중이거든!?”

“ 근데 왜 이 시간에 공부 안 하고 이러고 있어?”

“ 네가 생각나니까 온 거 아냐! 아니, 네가 생각 난 게 아니라 넌 어떻게 학교랑 엄마 돌보는 거랑 다 같이 가능한지 궁금해서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야. 돈은 어떻게 벌어? 좋은 방법 있음 공유 좀 해. 나도 돈 많이 벌고 싶어.”

“ 나 돈 없는데? 기초생활수급자로 생계급여 한 달에 100만 원 정도 받는 거. 치매 치료 때문에 빛도 있어. 19살에 빛 1500만 원이면 너무 슬픈가. 치료하다가 병원에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서 엄마 모시고 나온 거야. 복지센터 중에 가장 긴 시간 돌봄 지원받을 수 있는 곳이 여기라 좀 일찍 나오게 된 거고. 나 완전 빈털터린데...”

“ 뭐, 10대 가장 이런 거야?”

“ 그런 셈이지.”

“ 그러면 나도 너랑 비슷한 그런 거였네. 울 엄마는 내가 병원비 많이 벌어온다고 했는데 그것도 못 기다리고 끙끙 앓다 돌아가셨다. 치료제가 너무 비싸서 제대로 치료도 못 해봤어. 젠장 할 나라 아냐? 그래도 가끔은 홀가분해. 병원에 누워있는 엄마 볼 때마다 죄인 같았거든. 엄마 돌아가실 때 또 한 번 지옥으로 떨어져 죄인 같은 마음 이 들었는데 지금은 보호소에서 지내면서 그래도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아. 괜찮은 거라고 착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

“.... 돌아가셨구나. 힘들었겠다. 고생했네.”

나는 힘들었겠다, 고생했네 앞에 '너도'라는 말이 붙지 않은 것에 대해 또 의미를 부여했다. 성민이 마음이 넓고 깊은 것으로. 그래서 자신의 상황을 애써 진흙탕으로 끌고 가지 않으리라는 의지를 내비치는 것으로. 두 번의 대화로 난 성민이가 많이 좋아졌다. 처음이었다. 남자라면 치를 떨고 병신이라고 소리 지르던 내가 성민이 얼굴을 보면 자꾸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신기했다.

우린 서로 번호를 교환하고 자주 카톡을 했다. (사실 성민이보다 내가 보낸 카톡 메시지 양이 100배는 더 많을 것이다.) 성민이가 하교한 뒤에만 연락이 가능해 나는 당장이라도 성민이가 있는 학교에서 다시 학생 신분이 되고 싶었다. 나의 애정이 누군가에게는 결핍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그게 두려워 성민이와 따로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 성민이는 만나고 싶다거나 입을 맞추고 싶다거나 가슴을 만져봐도 되냐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슬프고 어둡고 조용하고 담담해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윤슬아, 지금 엄마가 좀 다쳐서. 지금 엄마 돌봄 센터에 들어갔어. 9시간 동안 엄마 별일 없겠지. 다들 수능 디데이 세는 데 나는 통장에 숫자를 세면서 불안에 떨고 있다니. 등등

간혹 ㅋㅋ , ^^ , ㅎㅎ 같은 글자와 표정으로 분위기를 잠시 바꾸기도 했지만 결국 대화는 금방 차분해지다 바닥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고3은 폐인의 시간이라고. 얼굴도, 마음도, 몸도 상할 대로 상해 공부만 해 폐인이 되는 시간.

성민이의 고3은 돌봄의 시간이었다. 나를 키워준 누군가를 내치지 못하고 돌봐야 하지만 정작 어른이 되다 만 우리는 어른 인척 약한 마음을 간신히 숨겨가며 휠체어를 밀고 슬픔을 외면했다. 똑같은 폐인인데 우리들의 19살은 그들의 19살과는 급이 다른 고달픔이고 슬픔이다.

“ 영케어러의 운명이야.”

그날 난 영케어러, young carer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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