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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애 Oct 25. 2019

순백의 차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윈춘의 어머니

차를 마시고 윈춘 여동생이 직접 차려준 점심을 먹으러 주방으로 가는 길에 차나무 씨앗을 골라 다듬고 계신 할머니를 만났다. 윈춘의 어머니다. 자그마한 체구에 조용한 손놀림을 보는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울컥 뜨거운 덩어리가 밀고 올라오면서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작년 여름 허무하게 가버린 울 어매의 모습이 투영되어서다. 그 작은 체구로 차밭을 헤집고 다니며 차 씨 따 모으느라 가을이면 늘 손이 거칠어졌던 어매, 당신 몸이 허락하는 한 찻잎 한 줌이라도 더 따서 보태주려고 봄날의 차밭을 종종걸음으로 헤집고 다니던 모습이 어제 같은데, 그 부재의 빈자리 너무 휑하다.


황편 골라내기 / 남자들은 구경만...

윈춘이 우리의 입맛에 맞춰 여동생에게 주문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향신료와 기름기 쫙 빠진 담백하고 맛있는 점심상이었다. 맑은탕 속 검은 빛깔의 고기가 쫄깃하니 소고기 같은 느낌인데 뭔가 독특한 맛이었다. 야생의 사슴 고기란다. 아! 그래서 이런 육질과 담백하면서 고소함이 있나 보다. 농가를 방문할 때마다 직접 차려주는 현지 가정식이 여행의 맛을 살려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고차수 차밭을 둘러보러 집을 나섰다. 집 앞에 삼삼오오 모여 황편을 골라내고 있는데 이 동네 남자들은 하나같이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다. 힘쓰는 일은 남자가 하고 차분히 앉아서 하는 섬세한 일은 여자가 하는 일인지 모르겠으나, 재미난 광경이다. 뒤에 노반장 가기 전 반분 마을의 초제소 작업장에 들렀을 때는 남자도 황편을 골라내고 있었다. 아마도 그곳은 회사여서 그랬겠지.


황편 골라 내기

황편만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완제품에 들어가면 차의 품질을 저하시키는 줄기나 이물질 같은 것도 골라낸다. 황편(黃片)은 찻잎을 살청 후 유념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비벼지지 않아 형상이 잘 말리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는 찻잎이 자랄수록 3엽이나 4엽은 1 ~ 2엽에 비해 부드럽지 못하고 점점 억세 진다. 그래서 부드러운 잎들은 살청 후 유념 과정에서 잘 말리고 형상이 제대로 잡히지만 억센 잎은 제대로 말리지 못해 골라내야 한다. 

황편을 골라내어 담아 놓은 박스를 보니 찻잎 딸 때부터 낱 잎으로 떨어져 나왔거나 살청과 유념, 건조 등의 제다 과정에서 줄기와 분리된 검은빛의 낱 잎도 보인다. 황편과 이물질, 부스러기 같은 것을 골라내는 정선 작업을 거치고 나면 비로소 차의 모양을 갖추게 된다.

황편을 골라 담아 놓은 상자

이 작업을 일일이 손으로 한다니 대단하다. 지리산에서 차 작업할 때 쳉이(키) 질을 하거나 선풍기를 이용하여 1차 선별 후 손으로 골라낸다. 그 작업도 만만찮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차 만들기의 한 과정이다. 우리 집 최저 시급 아르바이트생 중2 딸아이는 이 선별 작업 준비 들어가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줄행랑을 놓기 일쑤다. 혈기 왕성한 아이가 몇 시간씩 한 자 세로 앉아서 이 작업을 하기엔 너무 지겨운 일이다.


마흑채 고차수

마을을 벗어나 야생 바나나 나무가 군락을 이뤄 이국적인 풍경을 만드는 숲길로 들어 서자 차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리산 차밭에 자라고 있는 차나무들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다. 밑둥치의 굵기가 크고 키도 훌쩍 높아 손이 닿지 않는 곳의 찻잎을 따기 위하여 대나무를 잘라 가지에 걸쳐 발판을 만들어 놨다.


지리산의 차밭은 품종이 소엽종이고 이곳은 대엽종이니 그 크기나 잎의 모양이 사뭇 다르다. 차 폴리페놀, 아미노산, 카페인 같은 함량은 품종과 생태환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차 폴리페놀은 대엽종이 소엽종 보다 많이 함유하고 있지만 아미노산은 소엽종이 더 풍부하다.

이곳은 아열대 기후로 겨울에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 없지만 지리산의 차나무는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혹한의 겨울을 견디며 자란다. 비록 고삽미와 내포성은 대엽종에 비해 약하지만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찻잎엔 싱그러운 단맛을 내는 아미노산이 풍부하니 그 특징을 잘 살려 차를 만든다면 나만의 개성 있는 차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차밭을 둘러본다. 차나무가 자라는 생태 환경이 아주 좋다. 큰 나무들이 주위를 감싸고 있어 직사광선을 적당히 막아줘서 햇볕이 강하지 않게 들어와 쓰고 떫은맛이 적은 달고 부드러운 회감의 차가 만들어지기 좋은 조건이다. 고육대차산의 차나무가 자라는 이런 환경이 쓰고 떫은맛이 적어 목 넘김이 부드러운 차맛을 형성하나 보다.   

마흑채 고차수에 핀 차꽃

순백의 꽃잎과 황금빛 꽃술, 늦 서리 맞고도 향기 뿜어 내는 고고한 자태로 많은 차인들로부터 사랑받는 차꽃이 마흑채 차밭 여기저기 피어 바람결에 은은한 향이 날아왔다. 그 향기 따라 벌들이 모여들어 윙윙거리고 산길 걷느라 땀방울 맺힌 이마를 시원한 바람이 훑고 지나가자 바나나 잎들이 흔들리고 찻잎들 수런거린다.


가을 찻잎 하나 따서 입에 넣고 씹어 본다. 쌉싸름 떨떠릅하니 지리산 찻잎과 비슷한 맛이다. 곧이어 단맛이 살짝 돌고 풀내음 가시자 입안에 상쾌함 가득 흐른다. 이제 마흑채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아쉬움을 달래며 만전 차산으로 이동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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