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애 Oct 29. 2019

정운 초제소의 향기로운 밤

정운 초제소의 향기로운 밤

정운 초제소 차 부뚜막

안주인의 바지런하고 정갈한 손길이 집안 구석구석 묻어 나는 정운(靜云) 초제소(初制所)는 규모를 갖춘 제다공장이 아니라 시골 마을의 작은 농가였다. 마당 한켠 경사지게 만들어 차를 덖을 때 허리의 부담을 덜어 주는 무쇠솥이 2개 걸려 있는 차 부뚜막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쇠파이프를 연결해 만든 위조대의 대나무 채반엔 낮에 따온 찻잎들이 담겨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발효도 낮은 청차에서 나는 난꽃향 같은 맑은 향이 올라온다. 지리산에서 차 작업할 때 많이 맡아온 익숙한 향이다. 


오랜 세월 차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을 수밖에 없도록 붙잡아 놓은 참, 매혹적인 향이다. 꿀 향인 듯 꽃향인 듯 바람결에 날아오는 이 향기에 취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차를 만들어 온지 20년이 다되어 간다.


정운 초제소 안주인의 찻잎 펼쳐 널기

윈춘이 가져온 찻잎을 안주인이 대나무 채반에 얇게 펼쳐 너는 모습을 연로하셔서 거동이 불편하신 시아버지가 웃음을 띠며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머물며 바라본 이 가족의 단란한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위조대에서 찻잎 시들리기

대나무 채반에 얇게 펼쳐 널어 찻잎을 위조(萎凋)하고 있다. 위쪽 칸의 채반엔 오전에 따온 찻잎인 듯 수분이 많이 빠져 시들해진 잎에서 맑은 꽃향이 나고, 아래칸 채반에선 저녁 무렵에 펼쳐 널어놓은 듯 푸릇푸릇 싱그럽게 찻잎이 살아있다.

위조(萎凋)의 사전적 의미는 "식물체의 수분을 결핍케 하여 시들리고 마르게 하는 것"이다. 시들리기를 하지 않고 수분 많은 찻잎을 솥에 바로 덖으면 풋 비린내가 나고 유념할 때 물기가 많이 나와 덩어리가 심하게 생기면서 완성 차의 품질이 떨어진다.


밤새워 펼쳐 널어 시들리거나 몇 시간이라도 위조를 하는 이유는 찻잎이 가지고 있는 화학성분의 변화를 통하여 맛과 향이 좋은 고품질의 차를 만들기 위해서다. 시들리기를 하면 쓰고 떫은맛이 줄어들고 풀내음 같은 비린내도 사라지면서 시원 상큼한 감칠맛, 단맛이 증가하여 완성차의 향과 맛이 풍부해진다.


그렇다고 이 찻잎 시들리기를 너무 오래 하게 되면 수분이 많이 빠져 뜨거운 솥에 덖을 때 찻잎이 마르면서 부서질 수 있고, 화학성분이 너무 많이 분해되거나 변해서 차의 맛이 떨어질 수 있다. 적당한 시기에 시들리기를 멈추고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야 좋은 품질의 차를 만들 수 있다. 그 적당한 시기는 차 만들기에 있어 날씨, 찻잎의 크기 같은 변수가 너무 많아 그날그날의 상황에 맞춰 판단해야 한다. 오로지 차를 만드는 사람의 몫이다.


소박한 듯 정갈하게 차려진 저녁 식탁

가져온 찻잎을 위조대에 널어놓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회전식 원형 식탁에 모두 둘러앉았다. 대나무를 쪼개 엮어서 만든 이 회전식 식탁은 높이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

낮은 의자에 쪼그려 앉아 음식을 먹어야 해서 조금 낯설고 불편하지만 여행은 이런 색다른 경험이 쌓여서 추억이 되고 그리움이 되어 또다시 길을 나서게 만드는 바람 같은 것이다.


두부튀김과 콩나물은 별다른 양념이나 향신료 없이 소금으로 간만 맞춘듯해서 담백했다. 기름에 볶은 청채는 유채 맛이 나고, 매운 홍고추 넣어 물과 기름에 조리듯이 볶은 돼지고기 역시 양념이나 향신료가 적게 들어가 재료 본연의 깊은 맛이 살아 있다.


이곳은 가는 마을마다 닭들을 풀어놓고 키웠다. 정말 많은 닭들이 병아리와 함께 벌레나 풀을 뜯어먹으며 자유롭게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어미 닭이 병아리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은 우리 시골에서 사라져 버린지 아주 오래된 풍경이다. 가는 농가마다 식사를 차려줄 때 닭고기는 꼭 올라왔다. 이렇게 많은 닭들을 풀어놓고 키우는 것이 이해되고, 자연에서 건강한 식재료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이 부럽기도 했다.

안주인의 요리 솜씨도 한몫했겠지만 닭고기는 쫄깃하니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게 젓가락을 아주 분주하게 만들었다.


말벌유충과 차 주전자

멀리 한국에서 온 손님을 위한 특별식 고단백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그건 말벌의 애벌레를 기름에 튀기듯이 볶은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손님맞이를 위한 주인 부부의 마음을 생각해 한 마리 집어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식감과 조금 느끼함이 올라온다. 술안주로 먹으면 그런대로 궁합이 맞을듯하지만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하기에 젓가락이 자주 가지는 않았다.


낮에 마흑채 차밭까지 같이한 K가 다시 합류했다. 귀뚜라미 울음소리 따라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농가 마당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이곳 전통주인 옥수수 발효 증류주를 마시는 밤, 이곳 차농들과 섞여 같이 차를 만들고 연구하는 K의 생생한 체험담이 한껏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안주인이 마당 한켠의 차 부뚜막 대나무 바구니에서 오늘 건조된듯한 차를 한 줌 주전자에 넣고 끓는 물 부어서 유리잔에 따라 준다. 증류주는 독해서 이렇게 따뜻한 차와 같이 마시면 속이 덜 부담스럽단다. 첫 잔은 차가 우러나기에 부족한 시간이어서 물맛이 강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차가 우러나 맛이 깊어져 아주 맛있었다. 이국의 제다 현장에서 주전자로 따라 주는 이 차맛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듯하다.


차농 부부의 환한 웃음

차농 부부의 웃음이 해맑다. 지리산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의 쌓인 피로가 스르륵 풀리는 웃음이다. 앞으로 남은 여정이 이 부부 때문에 기대된다. 정운 초제소를 앞서 다녀간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윈춘 보다는 안주인의 인기가 더 높단다. 불편함이 없도록 섬세하게 손님을 챙기고 이런 밝은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니 충분히 그럴만했다.


풀벌레 소리에 묻어오는 가을 밤바람으로 서늘해진 몸의 기운을 따뜻한 차와 술이 덥혀 주고, 차가 좋아 이곳 차농들과 오랜 시간 섞여 사는 K의 무용담 같은 재미난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다 보니 정운 초제소의 향기로운 밤이 훌쩍 깊었다. 내일 일정을 위해 아쉽지만 술자리를 정리할 시간이다.



이전 04화 세상에 어둠이 내리는 시간, 만전 차산으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