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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애 Nov 01. 2019

닭울음소리 청아한 상명의 아침

상명의 아침

산골 마을의 어둠을 가르는 청아한 닭울음소리에 눈을 뜨고 창문을 여니 안개 가득한 가을 풍경이 펼쳐진다. 맑고 상쾌한 공기 속에 나락이 누렇게 익어 가을걷이가 한창인 차산 마을, 상명의 아침이다. 상명(象明)은 정운 초제소가 있는 이곳의 행정구역 이름이다.


전날의 긴 여정과 밤늦도록 이어진 술자리 탓에 눈을 떴을 때 몸이 좀 무거웠지만 맑은 공기로 심호흡을 하고 나니 한결 가벼워졌다. 대충 세수하고 1층 로비로 내려가니 윈춘이 먼저와 기다리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니 초제소로 가자며 차에 오른다.


우리의 면소재지 규모보다 조금 커 보이는 마을 중심가는 출근하는 사람과 오토바이, 차량들로 제법 붐빈다. 이른 아침 시간인데 식당들이 손님들로 분주해 보였다. 그 이유는 직장인들은 대부분 아침 식사를 집이 아닌 길거리 식당에서 쌀국수로 해결하기 때문이다. 여행길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이런 이국적인 풍경을 차창으로 스쳐 보내며 초제소에 들어서니 마당 원형 식탁엔 하얀 쌀국수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차 덖음솥에 장작불 지피기

우리가 식사를 하는 동안 안주인이 분주하게 차 부뚜막과 마당을 오가며 찻잎 덖을 준비를 한다. 앞쪽에 무쇠솥이 두 개 걸려있고 불을 때는 아궁이는 뒤편에 있는데 중간에 벽을 만들어 장작불에서 나는 연기가 솥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만든 구조다. 차를 덖는 동안 연기가 솥으로 들어오면 냄새가 스며서 차의 품질이 떨어진다.


지리산의 차 덖음 솥은 가스로 열을 공급하기에 연기 걱정 없고 한번 솥을 달궈서 불길을 조정하면 일정한 온도에서 차를 덖을 수 있는데, 이곳은 아직도 대부분 장작을 연료로 쓰고 있다. 이 아궁이도 연기 배출이 원활하게 잘되고 열 손실이 크지 않도록 잘 설계되어 있어 차를 덖는 부뚜막으로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다만, 아쉬운 점은 차를 덖는 중간에 불의 세기가 낮아지면 뒤편 아궁이로 가서 장작을 더 넣어 화력을 올려줘야 하기에 차를 덖는 동안 솥의 온도를 일정하게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찻잎 덖을 준비

밤새 위조대 채반에서 수분이 빠지면서 많이 시들려 진 찻잎은 색이 더 짙푸르게 변했다. 풀 비린내 나 풋내가 사라지면서 맑고 은은한 꽃향이 난다. 찻잎을 대나무 바구니에 옮겨 담으면서 찻잎 딸 때나 펼쳐 너는 과정 등에서 상처 입은 찻잎이 산화가 너무 많이 진행되어 갈홍빛으로 변한 것을 골라낸다. 이런 찻잎이 섞여 들어가 한솥에서 덖어지게 되면 차의 품질이 떨어진다.


  

찻잎 덖기

찻잎을 뜨거운 솥에 덖는 이유는 산화효소의 활성을 둔화시키고 다음 작업인 찻잎 비비기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산화효소는 단백질의 일종으로 열에 약해서 찻잎을 뜨거운 솥에 넣고 덖으면 대부분 파괴되어 활성을 멈출 수 있다.


찻잎 덖기는 차 만들기에 있어 아주 중요한 과정이다. 장갑 속으로 파고드는 수증기의 뜨거운 열기로 손놀림이 멈칫거려 제대로 익히지 못하거나, 솥의 온도가 너무 높거나 낮아서 찻잎이 적절하게 익혀지지 않으면 차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경험과 숙련이 필요한 차 만들기의 한 과정이다.


장작불 지핀 솥이 달궈지고 바구니에 담아둔 찻잎을 넣자 따닥따닥 소리가 나고 수증기와 함께 초제소 가득 차향이 흐른다. 소쩍새 우는 봄밤 지리산에서 수없이 반복하면서 참, 많이도 맡아온 향이고 들었던 소리다.


차를 덖는다는 것은 일체의 잡념 없는 무상의 시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 같은 것이지만, 봄 한철 차를 덖고 나면 몸무게 몇 kg은 빠지는 아주 고된 노동이다.


솥에 들어간 찻잎이 약 5kg 정도로 꽤 많은 양이다. 한 번에 덖는 찻잎의 양이 많으면 처리 용량이 늘어 일의 효율은 높일 수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골고루 익히지 못해 완성차의 품질이 저하될 수 있다.


그리고 찻잎을 뒤집을 때 팔과 허리에 힘이 많이 들어가고 한 솥의 덖음을 마무리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 체력 소모가 많아진다. 작업할 찻잎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아 2회에 걸쳐 이루어진 찻잎 덖기는 안주인의 노련미와 숙련된 손놀림이 어우러져 잘 마무리되었다.


찻잎 비비기

솥에서 덖기가 끝난 찻잎을 넓은 채반에 담아 윈춘이 털면서 열을 식힌다. 이때 빨리 열기를 빼지 않고 쌓아 두면 솥에 덖을 때 생긴 화근내 같은 것이 완성차에 남을 수 있고 차의 맛이 무겁고 답답해진다. 열을 식히면서 한 번에 비비기 적당한 양으로 나눠 공을 굴리듯 돌리고 밀고 당기기를 반복한다. 중간에 찻잎이 덩어리 지면 털어 풀어준 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찻잎을 비벼준다.


이렇게 찻잎을 비벼 주는 이유는 표피를 벗겨내고 세포막을 파괴하여 찻잎이 가지고 있는 여러 화학성분들이 잘 우러나게 해서 맛있는 차를 만들기 위함이다. 너무 강하게 비벼서 찻잎이 으깨지거나 하면 차의 탕색이 탁해지고 폴리페놀 같은 화학성분들이 한 번에 많이 침출 되어 쓰고 떫은맛이 강한 차가 된다. 이 찻잎 비비기의 강약은 완성차의 내포성과 맛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덖기를 끝마친 안주인이 합류해서 찻잎 비비기를 마무리한다. 찻잎을 덖고 비비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이심전심 서로 환하게 웃음을 주고 받으며 일을 즐기듯이 하는 부부의 모습이 참, 보기 좋은 아침이었다.


햇볕에 말리기


찻잎을 비비고 나면 대나무 채반에 얇게 펼쳐 널어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말린다. 날씨가 맑아 햇볕이 강하면 하루 만에 바싹 마른다. 햇빛을 받아 천천히 마르는 과정에서 찻잎은 약하게 발효가 진행되면서 고온의 전기 열풍 건조기로 단시간에 말린 것과는 확연히 다른 독특한 향이 형성된다.


찻잎 널기를 끝마친 안주인이 우리와 같이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K가 우려 주는 조금 특별한 고수차를 마셨다. 아주 오래전에 마을이 이사 가버려 야생으로 버려진 차밭의 찻잎으로 만든 차다. 우리기 전의 찻잎은 다른 고수차에 비해 검은색이 진해 보였다. 맑은 꽃향에 달고 부드러운 맛이다.


차나무 잎으로 만든 차의 맛과 향은 몇 가지나 될까? 그 무한의 깊이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 끝을 알수 없는 차의 세계, 작은 찻잔에 담긴 차 한잔의 매력 속으로 깊게 빨려드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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