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수 Jun 14. 2022

첫눈에 반하는 집이라는 건?

40대 김 부장의 첫 집, 첫 인테리어 이야기


살면서, 첫눈에 사람에 반해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했을 때는 신비한 힘이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광채가 느껴지고 내 귀에는 그 사람의 목소리만 들리게 된다.


살면서, 물건에 반해본 적도 있는가?


와이프를 학교 수업시간에 만났던 그 순간의 '첫눈 반함' 느낌처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도 그렇게 찾아왔다. 온갖 노력을 통해 얻은 매물이기도 했지만, 첫눈에 반하듯 이 집이 나에게 찾아왔다. 믿음반, 의심반으로 선택했던 주상복합이었지만 운명처럼 첫눈에 이 집에 반해버렸다.


느끼한 사랑 타령은 각설하고!

사람이 아닌 집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1. 미안하다. 일단 스펙이다


"취직도 스펙, 집도 스펙, 이 놈의 스펙...?"


안타깝지만 집을 고르는데도 '스펙'은 존재한다. 건축된 지 몇 년 차인 지, 관리비는 어느 정도로 나오는지, 아이들 학교는 얼마나 가까운지, 주차장은 어떻게 되는지 등등 기본적인 스펙은 충족이 되어야 한다. 高스펙도 필요 없다. 그 기업에 딱 맞는 인재를 채용하기 위한 스펙이 필요하 듯 내 조건에 딱 맞는 스펙은 있어야 한다.


미안하다. 집도 스펙이어야만 했다.



2. 동쪽 해는 남쪽에서 느끼십시오


나는 남향(southward) 성애자다. 따라서, 내 집은 남향이었으면 했다.


대략 이 정도의 따뜻한 채광이라고나 할까? 출처=https://unsplash.com/


'좋은 집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면 북향이 대수냐?' 싶은 꼰대스러운 말은 각설하고, 적어도 내가 살아야 할 집은 남향이어야만 했다. 여유 넘치는 일요일 오전, 마루 소파에 덜컥 앉았을 때 따뜻하고 밝은 아침 햇살이 느껴져야만 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종교 같은 것이었다. 꿉꿉하고 힘 빠진 오후 3시의 햇살이, 힘겹게 거실 창문을 넘실넘실하던 남서향의 시절의 세입자 생활은 이단 생활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레이다에 들어온 이 주상복합, 정남향 집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완벽한 만족을 단 한 개의 특급 조건만으로도 할 수 있을까?



3. 시간과 날씨는 완벽한 조건을 위한 Enabler


안타깝지만 흐린 날씨에 인연은 찾아오지 않는다. 멋지고 완벽한 조건일지라도,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 날에는 사랑의 콩깍지를 기대하기에는 어렵다. 집을 찾는 문제에 있어서는 적어도 그랬다. 멋진 남향, 착한 매물 가격, 타이밍, 교통, 교육, 상권, 자연 모두가 완벽해도 낙뢰가 내리치는 어둑한 오후 3시경에 본 집은 제 아무리 남향이라 할 지라도 좋은 카페에서 비호감의 맞선 상대를 만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인연은 우연처럼 찾아오기라도 하는 것인지, 부동산 사장님 손에 이끌려 이 집을 처음 구경한 날은 그날따라 유독 쨍쨍하고 맑은 날씨였다. 때마침 집 구경을 위해서 회사 휴가까지 낸 날이라 허겁지겁 집 구경을 할 이유도 없었고, 채광이 최고조인 점심시간 직전에 방문을 했기 때문에 조명 없이도 따뜻했던 그 집의 첫인상은 호감도가 쉴 새 없이 올라가기에 충분했다.


'어서 오세요, 새 주인님?'


미친놈처럼, 집이 내게 말을 걸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햇살 가득한 집이다. 물론, 인터넷 자료 사진일 뿐이지만... 출처: unsplash



4. 검증된 사람이 살던 집


극단적으로 가보자.


꿈에 그리던 아름다운 집을 찾았지만 살인자가 살았던 집이라면 그 집을 선택할 용기가 있는가? 아니면, 다소 낡은 집이더라도 따뜻한 가정을 꾸렸을 것 같은 사람들이 살던 집이 호감이 가겠는가?  자식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초록창에 검색만 해봐도 알 수 있는 사회적으로 저명한 지식인 가족이 살았던 집이라면 호감도가 높아지는 집이 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인연처럼 다가온  집은  좋게도 후자에 해당되는 집이었다. 평소 나도 그렇게 나이 들면 좋겠다 싶은 기운이 느껴지시는 인품 좋은 분들이 우리를 맞이해 주셨기에  호감도는 멈출  없이 빠르게 올라갔다. 특히 자식 교육 때문에 목동에 남기로  젊은 우리 부부에게는 이미 걱정 없이 인생의 중반기를 바라보시는 분들이  뿝던 좋은 기운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붉은 체리목 원본 인테리어를 제외하고는, ) 모든 게 욕심나는 집이었다.




5. 지쳐야 한다. 판단력도 흐려지면 유리하다


결정의 순간은 어쩌면, 더 이상 고민할 힘이 없을 때 슬그머니 찾아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매물이 자주 등록되지 않는 주상복합 아파트이기 때문에 수개월에 걸쳐서 매물을 찾아보는 일은 매일 반복됐다.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보다 더 자주 네이버 부동산 매물을 찾아봤고, 하루의 시작과 끝, 여유 시간에는 항상 이 주상복합의 매물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심지어 익스플로러 시작화면이 네이버 부동산이었다!.


몇 개월에 걸쳐 구경할 수 있는 집은 빠짐없이 모두 다 구경했었고, 어머니 뻘 되시는 부동산 사장님께는 항상 죄송했지만 단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하나하나 친절하게 소개를 해주는 일이 반복됐다.

(고맙습니다, 목동 대림부동산 사장님!)


"여보, 이러다 우리 이 동네의 빌런 되는 거 아냐?"

"응?"

"얼굴 다 팔려가지고... 나중에 집을 찾는다 해도 민망해서 못 사는 거 아닌가 몰라."

"..."


와이프의 말은 대부분 틀린 예감이 없었기에 섬뜩했던 순간은 종종 찾아왔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어느날 뒤돌아보니 이제는 섬뜩함 조차 익숙해질 만큼 지쳐가고 있었다. 내 집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싶을 때, 그렇게 행운같은 우연이 찾아왔다. 사장님의 배려로 이 집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마지막 매물이다. 이 매물만 보고 마음 접자'


반 포기, 지쳐서 아무런 기대도 없는 마음으로 집 구경을 하게 됐는데 여기 였다.

바로 여기였다.




집 구경이 끝나고, 1층에 내려와 다급하게 와이프에게 연락을 했다.


"여보, 0000호 보고 왔는데 너무 괜찮다. 이런 곳 안 나올 것 같아."

"아, 거기? 호가가 얼만데?"


역시, 와이프는 현실적이고 냉정하다.


"00억..."

"헐..."

"그래도 한번 퇴근길에 가서 봐봐. 그 만한 가치가 있는 집 같아"


몇 시간 후, 와이프는 퇴근하고 집을 구경하고서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괜찮더라. 저 집으로 하자!"


뉴 밀레니엄 당시 유행했던 체리목 레드우드 빛깔의 낡은 집이었지만, 많은 부분이 워너비 하우스에 부합했고, 입주 시기, 감당할 수 있는 가격, 타이밍 모든 것이 완벽했다. 지쳐서 판단력까지 흐려진 것은 금상첨화였다.


"계약 축하합니다"


뉴밀레니엄 감성 가득한 체리목 디자인이 가득 찬 '우리 집'이었다. (실제 인테리어 직전 촬영한 현장 사진이다)





이전 04화 어쩌자고 주상복합을 골랐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