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살, 계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나마 떠오르는 게 있다면 당시 나는 수능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는 사실. 대학교 진학에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무렵 나는 지독한 우울삽화를 겪고 있었다. 자살사고와 무기력으로 인해 입퇴원을 반복하며 지냈다. 보통의 고등학교 3학년들처럼 공부를 할 수있는 여력따위는 없었다. 시험은 커녕 살아갈 힘 조차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우울함의 끝을 달리던 어느 날. 오래전 받은 메일함을 뒤지다가 그녀의 이메일을 찾았다. 중학교때 국어선생님. 당시에 한자시험에 대한 정보를 메일로 알려주신 적이 있다. 추억속에서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명확하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을 아는 분이 아닐까라는 느낌이 들었다. 고작 중학생 신분이었고 선생님은 30대 초반이었다. 학교에서 그나마 젊은 선생님에 속하셨다. 수업중에 사담으로 의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세대차이가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따뜻하고친밀하며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는 분이었다랄까. 그러한 연휴로 무작정 '답'을 찾고자 속상한 마음에 그렇게 연락을 하고 만 것이다.
"꿈은 이루는게 아니라 꾸는거야."
네이트온이라는 메신저로 몇 마디 안부를 주고 받았고 내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그녀는 '꿈은 이루는게 아니라 꾸는 것'이라는 말과 위화의 '인생'이라는 소설책 한 권을 추천해주셨다. 기억은 거기까지가 전부이다.이후에 뵙거나 교류 할 수 없었지만, 저 문장이 강렬한 나머지 삶에서 깨나 오랜시간동안 잊고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이루는 것이 아니라 꾸는 것이라니. 도통 감이 오질않았다. 꾼다는 것은 무엇일까. 더군다나 이룬다는 것이 아닌 이유는 뭘까. 세상을 알기에는 어렸다. 납득이 잘 가지 않는 말이었다. 꿈에 닿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뭐가 되는거냐고. 또래들만 해도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있었다. 우울함만 나아지면 수능시험에 전력을 다하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마냥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당시의 믿음은 그러했다. '왜 해야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어른들에게 용기내어 물어봤자 "그럴 시간에 공부나 하렴"이라는 답변이 돌아올뿐이었다.
고등학교때만 해도 교대에 입학하려고 했다. 편부모 가정에서 자랐고 엄마의 빈자리가 컸던 탓인지, 일부 선생님들에게 정서적으로 의지를 하려 했다. 가정사를 알게된 선생님들은 대체적으로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게다가 뚜렷한 해결책도 제시해주셨다. 문과니까 교대에 입학해야 전망이 좋을거라며, 지금 내 선택지에서 그것보다 최고인 것은 없다고. 그런 기대에 토를 달 수있는 틈도 없었거니와 내 마음이 살아남기 위해서 그것만이 답이라 믿었다. 하지만 자신을 배제한 맹목적인 믿음은 순식간에 힘을 잃고 무너지기 마련이다. 억지로 하다보니까 어느순간 탈이 나고 말았다.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 다니기 시작한 시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부터이다. 당시에 탤런드 박용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시기와 겹친다. 처음에는 동네에 작은 개인병원에 갔지만, 지금 이렇게 자살사고가 심한 상황에서는 더 큰 병원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이전에도 마음의 병은 조금씩 자라고 있었지만 인지를 전혀 하지 못했다. 그렇게 큰 고통조차 교대에 가면 자연럽게 해결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그렇게 믿고싶었던걸지도.
그때는 어렸고 어리석었기에 판단을 할 수있는 잣대같은 게 전혀 없었다. 그저 감정선으로 가늠 할 뿐이었다. '이 모든게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이며, 좋은 것이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은 자꾸 불편해. 그 이유를 도통 모르겠어. 답을 찾고싶어.' 마침내 무의식속에 억압된 감정은 끓어올랐고 더 나아가 활화산처럼 터지고 말았다. 너무 외롭다고. 이 세상에 혼자인 것만 같다고 꺼이꺼이 어른들 앞에서 눈물을 터뜨린 것이다. 그런 상황속에서조차 돌아오는 답변은 크게 변한게 없었다. 너 지금 이렇게 울 수있는 힘으로 차라리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고.
이제와 애써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 다소 억울하긴 하지만 인생이라는게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기에 그것 역시도 팔자려니 결론냈다. 그때는 '교대'라는 한 가지 목표를 꿈이라고 정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꿈은 이루기보다 꾸는 것이라했다. 이 세상에서 존재를 부정당하면서까지 성취해야 할 과업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는 말이다. '이루는 것'과 '꾸는 것'의 핵심적인 차이가 여기서 갈린다. 꿈을 꾸려면, 꿈 자체를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대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든 간에 죽기 직전까지는 살아있다. 말장난 같지만 사실이다. 죽지않는 한 계속 살아 갈 것이다. 그런 연속적인 선상에서 꿈을 이해해야 했다. 꿈을 이룬다고 인생이 끝나지 않는다. 이루고 난 뒤에도 계속 움직여야 한다. 자신만의 고유한 자취를 만들어 나가는게 인간이고 또한 인생이다. 여기서 사후세계는 말이 길어지니까 논외로 하고, 결론은 죽을때나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인생을 만들어가야 한다.
나의 문제는 당시에 꿈이라는 것을 과대평가 했으며, 반대로 인생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하며 지냈다는 것에 있었다. 무언가 이루려는 마음에 근원에는 언제나 내 존재자체에 대한 불안정함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마음. 그렇다고 해서 정적인 목표지점으로 꿈을 이해하는 것이 언제나 불필요 하다는 것은 아니다. 목표를 가지는 것 자체의 긍정적인 효과 전체를 부정 할 생각은 없다. 여러 자기계발서에 소개되어 있으며 발전적이며 클래식한 방법 중 하나에 속한다. 하지만, 무언가 되고싶고 이루고싶은 목표라는 것은 생각보다 작은 요소에 불과하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세상에 있는 동안에 내 꿈도 살아 숨쉬고 있을 것이다. 꿈은 이루고 마는게 아니라, 계속 꾸면서 끊임없이 만들어나가야 할 대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