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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Aug 24. 2021

동시 상영 극장에 관하여 2.

본능에 충실하다.


인간의 본능에는 에로스와 타나토스 즉 성욕과 죽음에 관한 본능이 존재한다고 한다. 성욕은 창조의 근원이고 죽음에 대한 본능은 파괴의 근원이라고 간단히 도식화할 수 있지만, 사실 두 가지 본능은 서로 얽혀있어서 다양한 모양으로 인간들에게 나타나고 있다.



'평일 오후 네시'라는 것은 극장이 한산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동시 상영극장이라고 하는 것은 영화 상영비가 싸다는 것 외에도 성적인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도 좋을, 문란함을 허가받은 유일한 데이트 장소였다.



소년 잉마르의 성장영화 '개 같은 내 인생'은 어머니의 죽음을 다룬 영화였다. 뜨거운 스웨덴의 여름이라는 시간 속에서 잉마르의 주변 사람은 끊임없이 '성'을 이야기했고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넘나드는 심오하고 아름다운 영화는 끊임없이 신음소리를 내는 몇 안 되는 관람객에게 외면을 당했다. 영화 전체의 인텔리 한 공간적 설정은 단순히 섹스의 의미에서 '성'을 찾아 탐닉하러 온 관람객들에게 외면당했고, 영화 후반부까지도 그들이 원하는 '성'의 문화를 볼 수 없자 '헬로우 크라이막스'를 틀어 주라고! 외치는, 내가 보기에는 아직 덜 달아오른 수컷의 목소리에 의해, 은밀히 무엇인가를 행했던 사람들의 행동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어둡고 퀴퀴한 삼류 극장의 은밀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남자는 뜨거워질까. 홍조를 느낄 수 없는 그을린 얼굴의 오빠는 이상하게 자꾸 얼굴색이 바뀌어갔다. 말이 느리고, 성실하다고 평을 받은 그 오빠는 은밀한 삼류 극장에서 두 편의 영화를 같이 보자고 했다. 분명히 시간을 길게 내줄 수 있냐고 했다. 이제 막 학력고사를 끝낸 나는 소녀에서 아가씨로 변하는 방법이 화장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화장이 짙은 나는 '성'에 대해 무지했고 동시 상영 극장에 대해 무지했다. 영화를 보면서도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관 중간 자리에서 그것도 우리가 바로 볼 수 있는 직선의 자리에서 영화는 한번도 보지 않는 커플에 의해, 상영하는 영화의 주제와 잉마르의 순수함이 사라져갈 즈음 오빠는 느리게 운을 뗐다.



"공부 잘 하지...?"



기사식당 손님으로 왔던 오빠 나이가 스무 살이라는 이유로 쉽게 오빠라고 불렀을 리 없다. 여자를 보면 눈빛부터 달라지는 아저씨들과는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손톱 끝에 까맣게 낀 기름때가 더럽다고 느낄 때도 밥만 먹고 조용히 걸어 나가는 세 번의 만남이 여운으로 자리 잡을 만큼 부지불식간에 그는 내 마음으로 들어왔다. 화통하게 욕설을 퍼붓는 엄마의 목소리와 밥을 먹고 이를 쑤시며 30분 이상 알아들을 수 없는 정치 이야기를 하는 아저씨들 목소리 사이에서 나는 그 오빠를 찾았다. 어쩌면 말이 없어서 묻혀버릴 존재 그 오빠의 목소리를 찾았다. 하필이면 영화관 맨 뒷자리에서 들은 첫 질문이 공부 이야기라니...



"오빠는 꿈이 뭐였어요?"



나는 꿈만 꾸면 숲이 나왔다. 가끔은 꿈이라고 자각하는 중에도 꽃들이 풍기는 희미한 타르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냄새가 환각처럼 나의 몸으로 스며들어서 고요하고 아름다운 숲이 사랑하는 남자와 단둘이 마주하고 있는 은밀한 공간으로 느껴졌었다. 마치 영화관 뒷자리처럼 말이다. 내가 물어보는 꿈이 무엇을 먹고 살겠냐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오빠는 알았다. 내 옆에 앉아있는 오빠가 내 옆구리를 살짝만 건들여도 이미 나의 몸이 꼿꼿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고, 기사식당에 묶여있는 내가 자유 극장에서 '자유'를 갈망하고 있는 눈빛을 오빠는 읽었다. 우리는 질문하고 다른 답을 하고 다른 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평일 오후 다섯시를 넘기고 있었다.



에로스는 창조의 근원이며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신적 에너지이며,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성'의 근본이다. 말이 느리고 성실했던 오빠는 내 무릎 위에 손을 올리기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헬로우 크라이막스' 영화가 상영되면서부터 영화관은 본격적으로 모텔의 수준을 넘어섰다. 하지만 오빠와 나는 서로가 겪은 아픔을 나누고 그 아픔의 정도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데, 나는 꽃에서 풍기는 희미한 타르 냄새 처럼 자꾸만 오빠에게 마음이 기울어갔다. 근본적으로 오빠의 이야기는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그래서 잘 살고 싶은데 세상이 도와주지를 않는다는 회환의 이야기인데, 왜 나는 자유롭게 '성'을 나누는 삼류 동시 상영 극장에서 에로스라는 단어가 떠올랐을까. 나의 손이 오빠의 어깨를 감싸고 자연스럽게 오빠가 내 어깨에 기대어 울 때 영화표를 주면서 길게 대화할 수 있냐는 오빠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사람이 그리웠고, 그 사람이 기계를 만지지 않는 그리고 운전대를 잡지 않는 그리고 욕을 하지 않는 그리고 책을 읽는 나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는 파괴의 본능이다. 생명을 가진 사람이 생명이 없는 무생물로 돌아가려는 본능을 말한다.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혹은 타인을 파괴하려고 하는 본능이 바로 ‘타나토스’인 것이다. '헬로우 크라이막스' 영화가 신음은 가득한데 모텔에서나 할 수 있는, 자기 집에서나 할 수 있는 행위를 할 만큼 자극적이지 않았다. 영화관 중앙에서 버젓이 웃통을 깠던 남자는 스스로 발정하고 짧게 끝나버린 사정으로 이제 막 달아오른 여자에게 뺨을 맞았다. 그녀를 따라나가는 남자의 바지가 엉덩이에 반쯤 걸쳐있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몇 안되는 관람객들은 실소와 비웃음을 보이며 혀를 찼다.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지친 어깨를 기대며 이어가던 대화를 잠시 쉬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든 오빠나 막 학력고사를 끝내고 대학을 준비하던 나에게는 '파괴'의 언어가 가득한 '헬로우 크라이막스'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꾸는 꿈이 닮아있어서 아니 우리가 아직은 덜 때가 묻고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웠던 윤리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을 잊지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묻고 싶었다. 몸을 틀어 냉기가 가득한 삼류 극장에서 햇살을 가득 품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양 문학책 속에 등장하는 귀족들이 말했던 생명과 살아있음에 대한 고찰이 진짜 '성' 이죠? 묻고 싶었다. 내가 오빠를 이해하고 오빠가 나를 이해한다면 기름때 가득한 손으로 하얀 내 속살을 만져도 좋다고 말하고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달아오른 몸을 해결한 관람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비웠다. 고개를 돌려 스크린으로 영사기를 쏘고 있는 유리 창너머를 바라보았다. 직원의 눈과 마주쳤다. 반복적인 일과와 긴 영화 상영으로 그의 눈이 피곤해보였다. 졸린 눈으로 어깨를 떨구고 있는 영사실 직원에게도 이타적인 사랑이 투영되었다.



"오빠, 우리만 앉아있기가 미안한데..."


"그래도 돈 내고 들어왔으니 시간을 채우고 나가자..."



동시 상영 극장은 규칙이 있다. 파괴적인 제목으로 사람의 마음을 끌어모으고 그 파괴적인 제목이 알고보니 이타적인 에로스를 느낄 수 있는 성장의 영화 한편, 얻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제목만 에로틱한 영화 한편, 그렇게 두 편의 영화를 묶어서 상영한다. 아무 것도 몰랐던 나는 첫 데이트를 동시 상영 극장에서 했고 그곳에서 나는, 생물을 무생물로 만들어버리는 파괴적 에너지 '타나토스'를 보았고, 정신적 에너지 교감으로도 얼굴색이 바뀌고 가슴이 따스해지는 '에로스'를 배웠다.



그을린 오빠의 얼굴은 시간이 흐를수록 열정으로 달아올라 예쁜 홍조를 띄었고 환각 상태에 빠진 사람처럼 눈이 풀리고 손 끝까지 빳빳했던 나는 오빠의 손이 나의 볼을 감쌀 때 예감했다. 오빠에게 창조의 에너지를 나눠줄 수도 있겠다.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우리는 자유극장에서 '자유'를 누렸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날 두 편의 영화는 모두 제목만 에로틱한 영화였고, 오빠는 울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육체의 부활을 믿니? 나는 다시 태어났어. 너로 인해..."



그리고 그는 냉기가 넘치고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르는 그 곳에서 옷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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