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창문 앞, 파랗고 하얀 문양이 지중해 바다를 흉내라도 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산 작은 카펫 위에, 어제 막 발라놓은 초벌의 유화 그림이 놓여있다. 그림 주변 위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책 [가면 뒤에서]에서 '루이자 메이 올컷'은, 비밀의 여자 '진 뮤어'의 연한 하늘색 모슬린 드레스가 그녀의 금발 머리와 흰 피부에 대단히 잘 어울린다고 썼다. 예쁜 두상 주위로 숱 많은 곱슬머리 가닥이 여기저기 느슨하게 풀린 채 늘어져 있고, 섬세한 한쪽 발끝이 치마 밑으로 보였고, 흘러내리는 소맷자락을 귀찮다는 듯 이따금 가볍게 흔들어 뒤로 넘길 때마다 둥글고 하얀 팔이 살짝 드러났다고 썼다. 그리고 비밀의 여자 '진 뮤어'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고. 남자라면 누구라도 흐뭇하게 바라보고 싶어 할 한 편의 그림이라고... 그 마음으로 그림을 바라보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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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는 골드문트에 관한 이야기를 쓸 때, 가능한 피하고 싶은 이야기를 책을 빌려 꼭 써야만 한다면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아닌 골드문트라는 인물을 배태한 최초의 중요한 착상들 중 하나로서, 그 존재의 요체를 이루는 이야기... 그 이야기만 쓰고 싶다고 했다. [*책이라는 세계]
휠체어보다 목발을 주로 쓰는 내게 전시회를 찾아간다는 건, 그림을 오래 바라본다는 전제를 필요로 하고 목발에 기대어 부은 다리를 신경 써서는 안 되며, 아주 가끔 이렇게 누리는 호사스러운 취미를 오롯이, 그리고 아주 풍성하게 몰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휠체어 밀어줄 수 있어요?
훗날 아내가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를 모델로 한 [여인(1942)]은 폴 고갱의 타히티 시절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다. [달과 6펜스]에서 서머싯 몸이 그렇게 찾았던 '달', 타히티의 여인이 버젓이 눈앞에 보인다. 아...! 가슴을 다 드러낸 여인이 빛바랜 종이 위에 서 있다. 태풍을 예견하는 날, 비와 바람이 거센 날, 휠체어 바퀴에 바람을 가득 채우며 다짐했다. 어떤 그림이어도 좋으니 어떤 작품이어도 좋으니 불필요한 군더더기 없이 몰입하고 오기를.
이중섭.[여인] 기도와 간구가 통했나 보다. 헤세의 '골드문트'가, 서머싯 몸의 '달'이 내 눈앞에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입구부터 '이중섭'이라는 뜨거운 남자의 손길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도 좋을 그림과 한참을 머물러야 할 그림을 분별할 수 있을까? 부드럽게 휠체어를 밀어주는 그녀의 손길이 다소곳이 머물러있는 그림에, 나의 휠체어가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이미 한참을 돌아보고 난 뒤에도 다시 머물러 그윽하게 눈을 풀고 흘러내릴 눈물을 참아야 했던 이유는 '이중섭'의 '소'가 뿜어내는 역동성 때문도 아니고, 고아원 아이들이 끈으로 이어진 '연대'도 아니고, 보고 싶은 아이들을 '담배 은박지'에라도 그려야 했던 그리움도 아니었다.
왜 이렇게 먹먹할까.
이중섭 그가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던 그 당시 그 배경이 나의 언니가 누워있던 강원도 이름 모를 병원과 이어지고, 아무도 찾아가지 않아 '무연고자'로 장례를 치른... 언니의 그날이 자꾸 떠오른다. 식모로 살았던 언니가 '나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라는 쪽지를 두고 떠났던 그날의 풍경, 내 어릴 적 트라우마가 점철된 그날의 오후가 이중섭 모든 그림에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통증에 시달릴 때, 혼자 화장실까지 갈 수 없는 몸이 될 때,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견딜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결국 가족밖에 없다'는 빈곤한 대답으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버팀목이 필요하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생애문화연구소]
몸의 변화로 인한 불안에 대해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 지금까지의 내가 누구였는지만큼이나 아프게 된 이후의 내가 누구일지를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는 관계,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책에서는 몸이 아프고 힘들 때 나를 돌보아 줄 사람이 가족이 아닐 수 도 있다는 전제를 강조한다. 책에서는 '가족 같은 관계'라는 비유를 넘어 신뢰와 돌봄이 오가는 인간관계의 새로운 양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친구, 지인, 이웃이라는 단어가 사소화되어 익명에 가까운 이름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중섭은 왜 '무연고자'로 죽어갔을까.
나의 언니는 왜 '가족들'에게 연락하지 못했을까.
이중섭과 나의 언니에게 친구, 지인, 이웃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중섭의 그림은 그렇게 외롭고 힘들었던 그의 삶을 '무연고자'라는 한 단어로 압축되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끝없이 훌륭하고... 끝없이 다정하고...
나만의 아름답고 상냥한 천사여...
더욱더 힘을 내서 더욱더 건강하게 지내줘요
화공 이중섭은 반드시 가장 사랑하는 현처 남덕 씨를 행복한 천사로 하여 드높고
아름답고 끝없이 넓게 이 세상에 돋을새김해 보이겠어요.
자신만만 자신만만
나는 우리 가족과 선량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진실로 새로운 표현을, 위대한 표현을 계속할 것이라오.
내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 만세"
아...! 아내에게 보내는 이중섭의 편지가 애절하다.
색색이 들어간 그림편지를 해석하면 그의 사랑이 종이를 뚫고 돋을새김한다.
어쩌면 그가 '무연고자'로 죽었다 해도, 각자의 마음에 돋을새김 되어버린 그의 그림이 있어,
각자의 사연과 슬픔만큼 몰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연고자-가족이나 주소, 신분, 직업 등을 알 수 없어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
예시문) 길거리에서 숨진 채 발견된 그는 무연고자로 알려져 주위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바라기는 이중섭과 나의 언니가 하늘에서 새로이 찾아낸 공간은 연고가 있기를,
그래서 이중섭의 아내 남덕 천사와 아주 쉽게 조우하기를,
그래서 나의 언니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하나밖에 없는 딸이,
알코올에 의존하지 않은 맑은 정신의 엄마를 부둥켜안고 위로하기를.
더불어, 아주 큰 반경은 아니지만,
휠체어로 세상을 탐험하며 인생을 탐구하고 알아낸 내면의 이야기를
오밀조밀 글로 쓰면,
자기 이야기처럼 함께 울고 웃어 줄
공감의 지인, 이웃,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거실 창문 앞에 세워 둔 그림이 다 말라간다.
그림의 '연고지'를 제대로 인식하듯
그림 한 점 한 점을 아낀다.
그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한다.
내가 이중섭을 친구라고 여기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