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사람들-폐쇄병동 그녀.
뾰족한 연필 심이 뭉툭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여린 꽃 잎이 하나 둘 더해지고, 명암이 짙어지고, 제법 꽃이 만개했다. 현관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엄마?"
정적을 깨고 들어선 노랫가락의 주인공은 동생이었다.
"언니, 엄마는?"
"몰라... 문 닫아..."
어린 소녀는 무료했다. 연필을 깎았다. 다시 뾰족해진 연필심으로 무엇을 그릴까...
어린 소녀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려고 어른이 되고 싶은 건 아니다. 진홍 빛 립스틱을 바르고 나간 엄마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불안했다. 안방 문이 닫혔는데도 아빠가 내는 성난 목소리가 소녀의 세포를 자극했다. 귀를 기울여 싸우는 이유를 듣고 싶은데 동생이 막는다. 동생은 더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안방 문이 열렸다. 이내 몇 겹의 평화로 거실 풍경이 아늑하다.
"엄마! 배고파!"
동생은 밤 열한 시에야 늦은 저녁을 해결했고, 어린 소녀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읽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But if I know you now what you'll do, you will love me at once the way you did upon a dream.
어린 소녀가 더 어렸을 때 엄마는 영어 동화책을 미국 사람처럼 읽어주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달콤했다.
"엄마, 더 읽어줘요... 엄마, 엄마..."
태어나 십 년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는 불안했다.
"엄마, 나는 엄마가 좋아요.
엄마는 어른이 되려면 백 년을 견뎌야 하는 거라고 말했다. 어린 소녀는 그때 엄마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어린 소녀가 제법 크자, 엄마는 책을 읽어주지 않았다. 엄마는 밤마다 거리를 헤맸다. 그때마다 어린 소녀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읽었다. 울다가 잠이 들었고, 꿈을 꾸면 무서워서 깼다. 절망 속에서도 어찌 되었거나 시간은 흘러갔다. 이제는 엄마와 아빠가 싸우지 않는다. 동생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어린 소녀는 엄마를 기다리면서 연필을 깎았다.
저항이 심하면 침대 하나만 있는 작은 보호실(CR실)에 격리된다. 바깥쪽을 향한 창문도 시계도 없는 직사각형의 폐쇄공간, 더 극렬히 반항하면 그의 신체는 보호실보다 더 작은 직사각형 침대에 갇힌다. 양팔과 양다리가 묶이거나 (4포인트 point 강박), 심하면 사지와 가슴이 묶인 채 (5포인트 강박) 환자들 사이에서 일명 '코끼리 주사'로 불리는 안정제인 아티반을 맞는다. 기저귀를 차고 누운 채 몸과 의식은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다._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_김원영_P164
어린 소녀가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이제 막 심리학을 전공한 늦깎이 대학원생 과외 선생님은 소녀의 그늘을 읽었다. 소녀와 나누는 대화가 깊어지면서 소녀의 방황을 이해했다.
어린 소녀가 고등학생이 되었다.
"엄마는, 요즘도 늦게 들어오셔?"
"엄마가 먹다 남긴 술을 먹었어요."
"엄마도 아셔?"
"네..."
그때 나는 소녀의 팔목에서 진혼 빛 붉은 칼자국을 보았다.
그럼에도 위와 같은 입원 과정은 환자에게 치명적인 트라우마를 남기고, 환자의 남은 인격을 질환 그 자체보다 더 빠른 속도로 소멸시키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환자의 의지에 반하는 입원 치료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는 정신건강 정책을 둘러싼 가장 뜨거운 인권 이슈다. 그 입장이 무엇이든 강제입원이 '느닷없이' 한 사람의 인생에 찾아오고, 때로 정신질환 그 자체보다 더 갑작스럽게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포획한다는 점은 분명하다._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_김원영_p166
강제로 병원에 입원하던 날, 소녀가 말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과외 선생님과 통화하고 싶어요."
소녀는 택배처럼 이송되어 기계적이고 관료적인 절차에 따라 병원의 규율에 복속되었다. 위계질서의 맨 꼭대기에 있는 의사에게 폐쇄병동에 갇힌 소녀는 말했다.
"저는 미치지 않았어요."
하루에 5분, 아침 회진을 돌 때야 잠깐 만날 수 있는 의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곧 나갈 거야. 약 잘 먹고 말 잘 들으면... 내일 또 올게..."
개별 면담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았다. 의사는 환자들의 격리와 강박, 입원과 퇴원, 전화통화의 자유까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존재다.
소녀는 다시 연필을 깎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면 간호사와 의사가 수군댔다. 소녀는 마음을 바꾸어 간호사 얼굴을 그렸다. "언니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닮았어요. 예뻐요..." 긴 드레스를 입은 공주 그림에 명암이 생기고 드레스에 파란색, 초록색 색연필까지 입혀지면 간호사는 말했다. "그 그림, 나 줄래?"
소녀가 퇴원하는 날, 소녀의 과외선생님은 그녀에게 맥주를 따라주면서 말했다.
"엄마를 놓아줘..."
그날의 애절하고 간절함이 느껴진다.
소녀는 지금 스물네 살이다.
그림을 전공한 소녀는 햇살이 쏟아지는 테라스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과 막 그려 낸 그림을 사진을 찍는다.
"선생님,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그래, 보고싶구나...건강해야 한다..."
연필을 깎는다. 책상위에는 소녀가 그린 그림이 펄럭인다. 이제는 내 마음의 폐쇄병동 소녀를 놓아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