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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Oct 19. 2022

어느 장애인의 오밀조밀.

내가 만난 사람들 2-책에 중독된 그녀들.

서울 마포구 양화로 6길, 땡스북스 동네서점.


검색의 길을 따라 홍대 뒷골목에 위치한 동네서점을 찾아가기까지 한 달을 고민했다.

우선, 빛이 적은 어두운 공간 위에 낮은 채도를 입고 놓여있는 책이, 한글, 영어, 그리고 프랑스어이며,



내가 지향하는 유형(에니어그램 5번)을 가진 작가들이 쓴 책이며,

무엇보다도 1984books 출판사와 땡스북스 서점의 콜라보 장소에 가야 북 포스터를 받을 수 있다.

색감이 주는 따스함과 단지 표지가 예쁘다는 이유 때문에 책을 살 수는 없다. 읽지 않고 소장만 한다거나 보여주는 용도로 진열만 한다면, 바이런 경이 향유했던 시인의 삶처럼 벨벳 스모킹 재킷을  걸치고 시를 쓰는 낭만적인 삶만 추구하는 꼴이니 적어도 내가 구입한 책이 내실이 풍요롭고 작가의 삶을 충만하게 이끄는데 표지까지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한 달이 걸렸다. 노트북과 휴대폰에 1984books 책을 걸어두고, 책을 살 수 있는 형편과 인천에서 서울까지 가는 시간을 낼 수 있도록 기도했다. 낮은 입간판이 반긴다. 따스한 질감을 보고 만질 수 있는 시간이다. 충분히 느끼고 충분히 감사했다. 동네서점을 안고 있는 골목의 채도가 나를 감쌌다. 그날 나는 좁고 좁은 골목에 위치해서 좋고, 대형 서점이 아니어서 좋은 땡스북스에서 11권의 책을 샀다.




감미롭게 휴식을 취한 날이면 책이 토해내는 모든 언어를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그 누구와 이야기해도 너그럽게 안아줄 수 있는 날이었다. 느리게 흐르는 오후에 커피를 마주하고 앉아 사랑, 밤의 독서, 짙은 세속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때 나는 그들의 입을 통해서 정열과 배신, 질투 그리고 때로 게으른 오후를 읽었다. 이윽고 깊은 내면의 이야기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천천히 입 밖으로 흘러나왔을 때, 제안했다.


함께 책 읽어볼래요?


[우아한 독서클럽=우독클]이라는 독서모임을 만들었다. 입을 통해 규명하지 않은 삶을, 책을 통해 명확하게 이해하면 그들의 삶이 정돈되리라 믿었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글쓰기를 '칼 같은 글쓰기'로 규정했다. 현실을 감싸고 있는 겉면을 재단하고 절단해 그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현실을 드러내는 행위로써의 글쓰기를 지칭하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겪었던 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넘어서 현실에 개괄적으로 몰입하는" 에르노의 문장이 [우독클] 모임에서 실현되기를 바랐다.


조금은 젊은 young팀과 조금 더 나이가 있는 old팀으로 나누어 독서모임을 이끌기까지 우리는 사계절을 만났다. 위대한 개츠비를 흉내 내는 남자, 건축물을 제대로 감리하는 성실한 남자, 필사하고 외워도 이해되지 않는 비유가 많은 문장에 머리 쥐어뜯는 여자, 책 위로 커피 향을 얹어주는 여자,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을 보듬어가며 모든 멤버를 챙기는 여자, 그리고 책 모임을 리드하는 작가가 고르는 책마다 텐션의 정도가 똑같은 감탄사를 내뱉는 여자, 정독하고 읽어오는 책의 문장마다 사유의 질문을 안고 오는 여자... 이 모든 멤버들이 책에 중독되어갔다.


저는 항상 읽는 어머니의 모습을 봐 왔죠. 어머니는 바쁜 와중에도 읽을 시간을 냈어요. 가게의 벨소리에 읽기를 멈춰야 할 때면 마른행주나 다림질 거리 밑에 책, 신문을 감추셨어요. 아마도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는 게 두려웠던 것 같아요. (...) 독서에 대한 아버지의 무관심과 무심함-적당한 표현을 찾아보려 했어요.-에는 근본적인 무엇인가가 있었어요. [남자의 자리]에서 언젠가 아버지가 "책이 너에게는 유익한 것이지만 내가 사는데 필요하지는 않아"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했죠. 그것은 저를 거부하는 문장이었고, 아버지와 저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격차가 있음을 나타내는 문장이었어요._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 아니 에르노 인터뷰 중에서.


책을 읽지 않았던 문화와 책이 없으면 안 되는 문화권, 다르게 살았던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하나의 모양으로 다듬어지는 획기적인 방법이 있었다. '올바른 수용'이다. 내 말만 종용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을 수용하고, 완독을 못 하는 멤버의 삶을 지지했다. 물론 어지간히 수고를 요했다. 시간을 엄수하며 칼 같이 재단하는 습관을 내려놓았다. 어제의 슬픔이 오늘의 기쁨이 될 수 있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올바른 수용'의 첫걸음은 "그럴 수 있어요..." 그다음에 조용한 자리에서 각각의 고충을 털어내는 건강한 소통을 했다.


저기 길모퉁이에서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손가락에 반지가 박혀 있는 손을 허리춤에 받친 채 마치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주고받기라도 하듯 과장된 몸짓으로 말을 하고 있는 여자들에게도, 또 현관 아래에서 제비꽃과 성냥을 파는 여자들과 노파들에게도, 마치 태양과 구름 아래 펼쳐진 파도처럼 다가오는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가게 창문에 반사되는 불빛에 눈을 깜빡이며 이리저리 떠도는 소녀들에게도 모두 자신만의 삶이 있습니다._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중에서


귀족의 딸,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슈에 초점을 두고 살았던 우리는, 이제 그녀가 전달하는 핵심에 귀를 기울인다.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삶을 위해 손에 횃불을 들고 탐험해야 한다고 외치는 버지니아 울프의 진심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혼이 가진 심오함과 얄팍함, 그리고 허영심과 관대함을 밝게 비추어야 "인조대리석 바닥이 깔린 옷감을 파는 상점가에서 약사의 약병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향기 속에서 위아래로 흔들리는 장갑과 구두, 그 밖의 물건들로 가득한 변화무쌍하고 이리저리 뒤집히는 세상과 당신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는 울프의 고백이 내 것이 된다.






금속 철제 선반을 박아야겠어요.

기울어지지 않도록 수평자를 빌리고 책꽂이를 설치할 벽면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야 굉음의 거친 소리를 내면서 하얀 금속 책꽂이를 박는다. 그 공간에는 사계절, 눈물과 웃음으로 읽어 낸 young팀의 독서모임 책이 놓여있다. 커피 향 가득한 공간에 취미로 배운 그림 사이사이에 꽤 많은 책을 나열한 old팀 멤버는 홍대 뒷골목까지 찾아가는 열정에 한몫했다. 북트리 선반을 놓고 그 공간에 책을 진열하고 싶다고 말하는 young팀의 멤버는 이미 쉬는 날이 읽는 날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책에 중독되어갔다.


우리는 왜, 책을 읽을까?

왜 매주 만나서 책의 모양과 활자에 텐션 높은 감탄을 보이며,

공들여 쓴 필사 노트를 보여주며,

나만의 문장을 낭독할까?


쥘 베른의 '경이의 여행 시리즈' 중 하나인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보면, 불가능하다는 편견을 깨는 모험이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제목이 암시하듯 80일 동안 세계일주를 할 수는 없다. 그 모험이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에게 주인공은 말한다. 

"80일이면 족하오."

"나는 그 조건에서 그런 여행은 불가능하다는 쪽에 4천 파운드를 걸겠소"

"충분히 가능합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를?"

"그렇소"

"그럼 좋습니다. 언제 떠날 거요?"

"지금 당장"

"그건 미친 짓이오"


24시간이 모자라다고 하소연한다. 바쁘고 지친 일상에 책 보다 유튜브에 심취하고 TV를 보다가 잠이 든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한가하거나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심지어 책 살 돈이 아깝다고 한다.


가끔 바쁜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독서모임에서 허탈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미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자괴감에 몸서리치다가 한숨을 짓기도 했다.


고요한 가을 저녁, 그 미친 짓의 일련의 과정을 주마등에 비추어 본다. 그들이 사랑스럽다. 말, 말, 말 그들의 말이 사랑스럽다. 광기 어린 삶을 잠시 내려놓는 사유의 시간이 감사하다. 버지니아 울프를 논하고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동참하는 다음 주가 기대된다.


책에 중독되어버린 그녀들에게 채도가 낮은 책을 건네주며 말하려 한다.


"미친 모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낮은 채도의 책 중에 단풍을 닮은 책이 유혹한다. [순수와 비순수],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책을 뽑아 각도를 달리하면서 사진을 찍는다. 구순의 노모는 돈이 안 되는 책, 그만 보라고 말한다. 그렇게 열심히 읽고 그렇게 열심히 사진을 찍으면 누가 알아주냐고 묻는다. 구순의 노모가 알아들을 수 없는 미친 언어로 대답했다.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수정처럼 맑은 음색에 대한 강한 애착이라든지, 끝맺지 않은 제목의 경계에 놓인 말줄임표에 대한 어떤 방침이라든지, 결국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유들이다" 콜레트의 문장을 대신하여 낭독한다. 아주 크게.


구순의 노모가 장난 어린 목소리로 답한다. "미친 o..."

나는 본다. 노모의 입가에서 단풍을 닮은 미소를.

내가 거리를 헤매지 않고, 오히려 읽고 사유하는 책상에 앉아 있어야 그나마 안심하는 엄마의 미소다.

고로 나는 오늘도 책에 중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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