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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Oct 21. 2022

어느 장애인의 오밀조밀.

내 영혼의 단짝, 소울 메이트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마태오, 오늘은 어떤 옷을 입을까요?"

"초록 색"


질투는 초록의 눈을 가진 괴물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초록 괴물은 자신이 기생할 숙주를 신중히 물색하고, 수소문 끝에 질투의 대상을 찾는다. 괴물은 혼자 있는 시간을 골라 정중하게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심심하고 쓸쓸한 날, 어제보다 늦은 답변이 온 날, 밥을 먹다가 체한 날, 드라마 주인공과 내 삶을 비교한 날, 나는 초록 옷을 입었다.


마태오가 걸어온다.

손에 들린 것은 꽃과 선물이다.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는 부드러운 음성이 간지럽다.

가볍게 입술을 내밀어 그의 볼에 입을 맞추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초록이다.

신비롭고 매혹적인 초록의 눈.


그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놓았다.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이 비슷하듯, 이별도 비슷하다. 헤어졌으므로 공간은 어두워야 한다. 벗어놓은 초록 괴물에 먼지가 쌓여갔다. 초록 스웨터, 초록 원피스, 초록 양말을 접어 슬픈 감정과 함께 서랍 깊숙이 넣었다. 노란색, 오렌지색, 푸른색 옷들을 하나 둘 꺼내며 닫힌 커튼을 열었다. 빛의 알갱이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더 이상 시선을 돌릴 수 없다. 다시 세상으로, 나갔다.



세월의 숫자가 더께처럼 달라붙었다. 

"몇 살이세요?"

"아직도 혼자세요?"


괴로운 순간에도 슬픈 표정을 감추었다. 슬픔이 슬픔으로 드러나는 것, 절망이 절망으로 드러나는 것을 거부했다. 서러운 순간에는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응시했다.


와인이 필요했다.


과일향이 나는 상큼하고 가벼운 레드와인에서 붉은 꽃과 붉은 과일류의 폭발적인 향이 난다. 가벼운 탄닌 구조는 기분 좋은 산도로 바뀌고 혀끝을 따라 남아있는 와인의 끝 맛이 입안에 머물던 기운을 없애준다.

이런 와인에는 샤퀴트리, 키슈, 피자, 고기 파테, 테린, 특히 소나 양젖으로 만든 단단한 치즈가 어울린다. 기운을 품고 있는 단단한 치즈를 꺼내서 한 입 응얼 응얼.


어느새 나의 영혼은 나를 벗어나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 가능하면 아주 높고 깊은 그 공간으로 들어간다.


본능은 남자한테만 있는 게 아냐.

[부부의 세계]에서 지선우가 말한 대사가 몸의 기슭을 타고 올라오자,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떠올랐다. 외설로 인식하고, 섹스라는 노골적인 단어가 보이면 덮어버렸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뜨거운 대사가 혀끝에 남아있는 와인과 함께  비장함으로 다가왔다.


책을 펼친다.


세월의 더께는 책의 수위를 올렸다. 잘 읽히고 제대로 읽어내는 책의 숫자가 쌓일수록 작가가 그려낸 가상의 인물과 교감했다.


채털리 부인, 코니도 그랬을까?

본능을 거부하고 가식의 가면을 쓰고 철학을 논하는 코니는 D.H 로렌스가 그려 낸 남근의 상징 사냥터지기 맬러즈 앞에서 가면을 벗어던졌다. 둘의 뜨거운 사랑을 '섹스'라는 단어가 남발하는 외설로 읽지 않았다. 맬러즈의 자유로운 본능은 코니에게로 한정되었고, 코니가 해를 입지 않도록 주의하고 주의했다. 맬러즈의 페니스는 남근을 자랑하는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자기의 여자를 위한 정서적인 교감을 위해 우뚝 솟았다. 맬러즈의 관능이 읽혔다. 


그날 나는, 본능적으로 맬러즈를 탐했다.




세월의 더께는 질투라는 감정을 초록 이끼로 덮어버렸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속아 아기 염소들이 순순히 문을 열어주거든 들이닥쳐 잡아먹을 속셈을 가진 남자들을 안다. 이제는 남자와 여자를 넘어 '자기만의 방'을 가진 누군가와 시간을 공유하는 삶이 좋다. 

한가로운 날은 '나만의 공간'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는다. 자정부터 다음날 이른 시간까지 진하고 향기로운 커피를 홀짝이다 보면 지면에서도 어김없이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낮보다 부드럽고 조용하고 차분한 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 복도를 울리는 엘리베이터 소리,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삐걱대는 창문의 흔들림 소리, 예측이 가능한 안온함이다.



알고 싶지 않아.


철퍽철퍽,

그가 물을 밟으며 강으로 들어갔다.

손으로 물살을 가르며 성난 근육을 과시했다.

가진 것을 자랑하고 더 나은 미래를 과장했다.


"마태오, 알고 싶지 않아요." 조금은 거칠게 저항했다.


돌아오는 밤하늘에는 별들이 조잘조잘 소란을 떨었고, 소원을 빌 필요조차 없는 완벽한 충만함이 내면에 가득했다. 결심했다. 너랑 함께여서 불행하고 내가 혼자여서 불행하다면 인생을 내가 느끼는 대로 글을 쓰는 것을 택하겠다고. 


단짝을 펼친다.


하얀 노트북 지면 위에 글을 쓴다. 내가 자유로워지기 위해 글을 쓴다. 타닥타닥.

깜빡 졸았을지도 모른다.

하얀 커피 잔 바닥에는 하트 모양의 진한 에스프레소 가루가 찐득하게 굳어있다.

터키 식 커피 점을 치듯 들여다본다.

만났던 남자, 만났던 인생들, 그리고 다시 만날 사람들을 그려본다.

'조금은 더 외로워도 괜찮아.'


제대로 된 문장도 아니며 맥락도 닿지 않을 문장이 노트북 위에 펼쳐진다. 노트북 위로 뻗은 손을 접어 오른손과 왼손을 포개어본다. 하얀 손, 그 위에 주름이 접힌다. 보드랍고 따뜻하다.


'나는 한때 젊었고, 뜨겁게 사랑했다. '


나의 목소리는 천년을 묵은 나무껍질처럼 갈라졌다. 예기치 않았던 탁하고 뭉클한 슬픔이다.


소울 메이트가 필요하다.


다시 책을 펼친다.



인생의 격이 완벽하고 완전한 문장으로 결정되는게 억울했습니다. 실격당한 몸으로 태어나, 타자와 구별되는 격을 갖기 위해 깊이있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뜨겁게 사랑했고 뜨겁게 실패했습니다. 참으로 오밀조밀합니다. 앞으로도 어느 장애인은 오밀조밀하게 인생을 그릴 것입니다.


단짝 노트북을 펼치고, 소울 메이트 책을 읽으며, 와인 한잔이면 족하다고 웃으면서 말이죠.


아, 어쩌면 또 다른 '마태오'가 노트북과 책을 들고 온다면 저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커다란 눈망울 끝에 투명하게 매달린 눈물까지 보이며 말할지도 모릅니다.


"오, 마태오! 레드 와인 한 잔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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