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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Jul 06. 2020

불편한 것일 뿐,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무심코 던진 말들에 관하여.

에니어그램은 내면 여행을 도와주는 도구이자 인간 이해의 틀이다. 크게 인간 유형의 틀을 아홉 가지로 보고 각 유형 양 옆에 있는 숫자를 날개라고 표현하며 그 날개는  살아가는 패턴을 보여준다. 그리고 에니어그램 하위 유형으로 생존본능이 있다.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자기 보존 본능 (Self-Preservation subtypes: SP)과, 성적 본능 (Sexual subtypes: SX), 그리고 사회적 본능 (Social subtypes: SO).

나는 에니어그램 7번 유형으로 성적 본능이 강한 사람이다.

성적 본능 (Sexual subtypes: SX)
일대일의 친밀감이 곧 나(I am my intimate relationship). 사랑의 욕구가 강하고 사적인 일대일 관계에 가장 관심이 있다.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너'이다. 살아남기 위해 일대 다수로서가 아닌 일대일의 관계를 쌓는다. 이들은 경쟁적이고 집중력이 강하다. 자신에게 쾌락과 자극을 주는 소수의 동반자를 원한다. 이 '동반자'에는 사람, 사물, 일거리 모두 포함된다.



시작은 달콤했다.

“네가 좋아...”

그리고 무심코 던진 말

“얼마 전에 만났던 그녀는...”

알리오 올리오의 마늘을 으깨며 생각했다.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이렇게 불리겠지. 얼마 전에 만난 정미 말이야...’


일대 다수의 대화보다 일대일의 대화를 선호한다는 것은, 나만 바라보고 있는 눈빛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일 텐데 다 깨져버렸다.

일대일 친밀감이 사라지는 그 순간이 나에게 욕을 했거나, 비웃거나, 관심이 없을 때가 아니라 의도 없이 무심코 던진 말이라니...

나는 그때 가지런하게 정리되지 않은 냅킨을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정리하며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사실 그는 문제가 없었다.

시선은 나의 얼굴을 보고 있었고,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콤한 말을 들려주고 있지만 나는 이미 가슴속 깊이 숨겨두었던 어둠의 상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부터 그의 모든 말은 해석되고 다른 의미가 부여되니

먹다 남은 알리오 올리오의 면발은 포크로 난도질을 당했고 애꿎은 냅킨은 잘게 찢어지고 있었다.



나는 상담사를 하기 전에 아이들을 가르쳤다.

하얗고 예쁜 손을 소유한 수현이는 피아노를 잘 치는 여학생이었다.

수현이에게는 눈에 띄는 습관이 있었는데, 책상 위에 손을 올려놓게 되면 손가락 네 개를 구부리고 손톱이 보이지 않도록 올리는 것이다.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수현이는 수시로 손톱을 깨무는 버릇이 있었으니 아마도 손톱의 모양이 예쁘지 않아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수현아, 손이 예쁘다. 피아노를 치게 되면 하얀 날개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손이 움직이겠지? 손가락이 가늘고 예쁘다.”

그때까지도 네 개의 손가락은 구부러져있었다.

“수현아, 선생님 손 봐봐. 목발을 짚어서 손바닥이 거칠지. 가끔은 나무껍질처럼 벗겨지기도 해...”

그때였다,

그 예쁘고 하얀 손가락들이 하나씩 펴지면서 뭉뚱 하게 잘려진 손톱이 보이기 시작했다.

손톱깎이가 아닌 입으로 물어뜯어 손톱 안에 살들이 물어뜯은 흔적을 보여주듯 빨간 피를 머금고 있었다,.

“선생님, 저는 불안할 때마다 손톱을 물어뜯어요...”

“선생님도 그랬어. 그런데... 언제부터 수현이 손톱이 이렇게 짧아졌을까?”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손톱이 못생겼다고 했어요. “

“그랬구나...”

“그런데요, 저는 못한다고 하면 더 못했던 것 같아요. 못생겼다고 하면 더 감추고요...”

“그런 경험이 많았어?”

“엄마는 제가 2등을 하면, 1등을 했어야지! 예쁜 옷을 사서 엄마에게 보여주면 어울리지 않는다고 벗어버리라고 했어요. 제 의견은 늘 묵살됐어요.”

“그 경험이 손톱을 물어뜯는 것과 연관이 있어?”

“사람들 눈치 보는 제게 -손톱이 못 생겼다-라는 말은 충격이었어요. 시작은 손톱을 가지런하게 정리하기 위해 이빨로 물어뜯은 건데... 갈수록 손톱이 짧아졌어요.

이제는 사람들에게 제 손톱을 보여줄 수가 없어요... 후... 전 늘 당하기만 하고, 저는 불행한 아이 같아요.”


트라우마-과거 경험했던 위기, 공포와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때 당시의 감정을 다시 느끼면서 심리적 불안을 겪는 증상을 말한다.

시작은 친절이었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목발에 의지하고 걸어가는 내게 이웃 아주머니는

“제가 들어드릴게요”

정이 살아 있는, 친절한, 마음이 예쁜, 여러 가지 미사여구를 동원해서라도 칭찬하고 싶은 그분의 기분 좋은 배려에 나는 미소를 보이면서 그녀와 호흡을 같이하고 걸었다.

“참 밝은 얼굴을 가지셨어요. 어머님께서 대단하셔요. 장애인을 잘 키우셨어요.”

그때였다.

길거리에 떨어진 애꿎은 나뭇잎은 목발에 난도질을 당해 찢겼고, 목발과 운동화 사이사이 기어가던 개미 몇 마리는 이미 죽음을 당했다. 내 목발 고무에 의해 질식사로.

그녀가 무심코 던진 말에 직선으로 향했던 나의 미소는 이미 구부러진 고무줄처럼 나를 다른 생각에 잠기게 했다. 그리고 목적지도 아닌 곳에서

“감사합니다. 그만 들어주셔도 돼요” 그녀와 경계를 긋고 어색한 미소 날리며 그녀를 밀어냈다.

그녀는 문제가 없었다.

나는 트라우마를 가장한 실패자 코스프레를 한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 낙인이 찍히고, 성격 부여가 되고, 규정될 수밖에 없듯이,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도 우리를 바비큐 꼬치에 꿰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 있어 그녀는 -건강식에 대한 관심-발목-야외장터를 좋아하는- 수학적 재능- 오빠와의 관계-클럽을 좋아하는-차에서 음악 듣기를 싫어하는-게으름을 싫어하는-[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 가 by. 알랭 드 보통]
알랭 드 보통은 그녀의 연인 클로이를 바비큐 꼬치에 꿰며 그녀를 파악하고 이해했다.

누군가 말했다.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에 머무는 병적인 트라우마 때문인데, 그 트라우마는 그 사람의 진심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왜곡하니 결국 골방에서 혼자 울고 있다고.

나는 사람을 바비큐 꼬치에 꿰며 내 식대로 해석했다.


나의 직업은 상담사이다.

내담자를 위해 치료기법으로 사용했던 [빈 의자 기법]을 나에게 적용했다.

전통적인 빈 의자 기법은 나와 갈등 관계에 있는 상대방을 생각하며, 상상으로 상대방을 빈 의자에 앉히고 나와 상대방의 역할을 오가면서 감정과 생각을 느껴보는 것인데,

나는 휠체어를 내 앞에 두고 대화하기 시작했다.

“황 정미 씨, 무심코 던진 말에도 과거로 돌아가 괴로워한다는 것은, 아직도 그림자를 직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상담사 전에 했던 선생님 말투에 스스로도 놀라, 다시 질문해 본다.

“정미야, 무엇이 그렇게 힘드니...?”

질문에도 묻어나는 쓰담쓰담은 내가 묻고 내가 답하는  치료이지만 서서히  마음 깊이 묻어 두었던 어두운 상자를 열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장애인이라는 말이 힘들어요...”

“인정해야지... 바뀌지는 않잖아... 그리고...?”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이 가식 같아요”

“그랬구나.”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짜 같아요”

“그랬구나”

“내가 가진 것을 빼앗아 갈 거 같아요.”

“그랬구나”

“잊힐까 두려워요.”

잠시 오열한 것 같다.

휠체어 바퀴가 돌아가고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휠체어 앞에서 잠시... 오열한 것 같다.


의도적으로 연습하면, 아이가 부모에게 훈육을 받고 변화하듯 달라진다.

빈 휠체어 기법 이후로 나는 호흡이 느려지고 사람의 말을 경청하며 그 사람의 눈을 보고 대화한다.

이제 다른 생각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내 주변에 물건은 없다.

애꿎은 사물이, 애꿎은 개미가, 나의 상념에 의해 파멸되면 안 된다.

나는 나쁜 습관을 파멸시켰다.

달콤한 말은 달콤하게 듣고, 친절한 말은 친절하게 들을 것이다.

검은색 상자에서 과거의 트라우마가 하나씩 하나씩 나오자 나의 얼굴은 변하기 시작했다.

예쁘다에서 심지어 이국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과도하게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무심코 말한 사람에게 반응하지 말자. 그들은 문제가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검은색 상자가 벗겨지고 사라져야 현재를 오롯이 즐길 수 있다.

녹아들듯 가라앉는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니 무심코 던진 말이 돌이 되지 않고, 실패자 코스프레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저는 장애인입니다. 불편할 뿐이지 불행하지 않습니다.”


이국적인 나의 외모를 뒷받침하는 휠체어를 사야겠다.

세련된 명품 휠체어 말이다.

루이비0. 휠체어가 있으면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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