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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Nov 11. 2023

재실, 변화를 담고 있는 공간

사라져가는 시간의 흔적들


경주의 곳곳을 다니면서 살펴본 첫 번째 대상은 문화재였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기도 했고 평소 관심있는 분야였기에, 또 경주는 전국에서 노출문화재 즉 야외에 있는 문화재가 가장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지정문화재 뿐만 아니라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도 포함해서. 그래서 우선은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국보와 보물, 사적, 시-도 지정문화재 등을 위주로 답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다니다보니 어떤 문화재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정류장에서 1시간 이상 걸어가야 하기도 했다. 버스 배차 시간에 맞춰 움직여야 했기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대중교통으로 가는 방법을 소개할 수 있었다.


경주는 느리게 여행할 때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도시다.

차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장소 장소를 보는 여행을 하기에 경주는 맞지 않다. 왜냐하면 경주 여행의 핵심은 바로 시간을 보는 것. 문화재를 통해 시간여행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여행이라는 건 결국 상상을 통해 과거의 시간을 내 나름대로 보는 데 있다. 상상은 시간이 필요하다. 어떻게 이 곳이 만들어 졌을지, 당시 사람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했을지 그렇게 천천히 상상을 하면서 그 공간을 나의 시간으로 채워가는 것. 그게 경주라는 도시를 200% 느낄 수 있는 방법이다. 문화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나 식견은 없어도 된다. 있으면 볼 수 있는 것이 더 많긴 하겠지만 우리는 문화재를 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간 게 아니니까. 중요한 건 인증 하듯 가봤어, 하는 목적으로 가느냐, 아니면 그 문화재를 머리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느껴보느냐의 차이다.

 

문화재마다 앞에 있는 안내문만 보고 아, 그런 곳이구나. 국보래! 보물이래! 하는, 도장깨기 여행은 경주의 시간을 제대로 즐기는 법이 아니다. 혼자 떠난 여행이라면 또 혼자대로, 친구나 가족과 함께라면 서로의 상상을 한번 펼쳐보는거다. 나는 이곳을 이렇게 상상했어. 이 탑의 저기 움푹 채인 건 석공 한 사람이 이렇게 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야. 한참 후에 탑에 자주 놀러오던 아이들이 뛰어 놀다 그런걸거야.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의, 역사의 사실보다 알지 못하는 사실이 훨씬 더 많다. 최소한의 사실을 밝히고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역사가의 역할이라면, 전문가가 아닌 대다수 우리 같은 사람들은 문화재를 통해 시간의 흔적을 상상으로 채워보는 데 있다. 터무니 없는 상상이라도 좋다. 나 혼자 상상해보는 건데 어떤가. 그저 나는 이곳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상상한다는 것인데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경주 남산 동쪽에 있는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 중 동쪽 삼층석탑. 1200년 전 어떻게 돌을 이렇게 가공할 수 있었을까.


역사적 사실로서의 가치에만 집중해서 보면 문화재가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건 당연하다. 하지만 거기에 이야기를 담고, 상상을 담고 바라보면 문화재만큼 재미있는 대상이 없다. 작은 삼층 석탑 앞에서 누군가는 소원을 빌었을 거고 누군가는 사랑을 맹세했을 지도, 또 누군가는 긴 헤어짐을 앞두고 재회를 약속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누구를 떠올리는가.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는 문화재의 가치는 거기에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과거의 시간을 통해 오늘의 나를 생각해보는 것.  


그렇게 문화재들을 답사하고 다니면서 편하게 도보로 다닐 수 있는 곳들을 길로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게 경주의 모든 문화재를 다 가보았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몇 군데는 안전상의 이유나 일정이 맞지 않아 가보지 못했고 몇 군데는 일부러 남겨두고 있다. 첫 술에 배부르면 재미 없지 않은가. 상상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신비의 장소로 남겨두었다.


그렇게 문화재를 답사하고 다니면서 곳곳에서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건물들을 보게 되었다. 굳게 문이 닫혀 있는 곳도 있었고, 방치되다시피 해서 으스스한 폐가 같은 곳들도 있었다. 그곳들은 전부 특정 가문, 즉 문중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모시는 공간인 재실이었다. 경주에는 알려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은 재실만 100곳이 넘었고 몇 군데는 쇠락해서 거의 스러지기 직전인 곳들도 있다. 사라진 곳들도 있고. 그렇게 재실을 다니면서 문중의 관리자 분을 만나기도 했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재실도 있지만 대부분 비지정문화재다. 우리가 생각하는것 보다 전통한옥은 손이 많이 간다. 건축자재 역시 대부분 목재를 사용하다보니 보수비용도 만만찮다. 양동마을 같이 양반들이 살던 한옥들이 오랜시간 유지해 올 수 있던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 요인이 컸다. 당시에는 집안일을 보아주던 하인들이 함께 생활했기에 유지가 가능했지만,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로는 노동력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는 형태가 되었다. 중요한 건 모든 양반 계층의 부유함이 그대로 이어지진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반도에는 큰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고 지배층인 양반 중에서도 일본에 협력하는 소수의 지배층이 있었던 반면 대다수의 양반계층은 전통적인 사회 관념에 따라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일제에 저항했다. 하지만 일제는 한반도 지배를 위해 자본주의를 수탈적으로 도입시키면서 많은 양반 계층이 몰락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토지조사사업이나 화폐개혁 등은 모두 허울 좋은, 일제가 자신들의 통치를 수월하게 하기 위한 경제 정책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지만 의, 식, 주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 주거 공간의 부재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전통한옥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도 한 요인이 되기는 했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이러한 사회의 변화도 한 몫을 했다.


사회가 현대화 되면서 주거 공간도 더는 전통 한옥이 아닌, 시멘트로 만든 공동주택 형태가 일반화 되었는데 그렇다보니 전통 한옥 건물은 점점 자리를 잃어간다. 오랜 모습을 유지하자니 비용도 많이 들고 실제 거주하기에도 불편한 점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주공간은 바뀌어갔지만 조상을 기리는 공간인 재실은 여전히 과거의 형태를 유지하는 곳이 많았다. 물론 원래 재실을 허물고 현대 건축으로 지어 형태만 전통 한옥을 유지한 재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재실은 기존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거나, 아니면 유지할 여력이 되지 않아 방치되는 곳이 많았다.


과거의 시간을 담고 있는 건축물이라는 데서 문화재와 재실은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문화재는 국가로부터 정기적인 관리를 통해 유지에 큰 어려움이 없지만 재실은 개인이나 문중에서 관리를 온전히 해야 하므로 그 형태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그건 어쩌면 시간의 변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재실들이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 방치되거나 스러져가는 현실이 매우 안타까웠다.


그 예를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경주 안강읍 하곡리에 있는 옥서정이다. 옥서정은 1924년 포애 이능겸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 재실인데 지금은 관리가 되지 않아 곳곳이 허물어졌다. 옥서정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써져 있다.


존고조부님 여강 이공 휘 능겸께서 옛날 약간의 토지를 기증하신바 고마움의 뜻으로 옥서정을 설립했으나 후손들의 관리 소홀로 기울어 가는 정자를 볼 때 가슴이 아파옵니다. 당시 비석을 세워 선행을 기록으로 남기려 했으나 극구 만류하시어 무서의 비석이 마루밑에 90여년간 방치됨에 보다 못해 이렇게라도 세웁니다.



재실만큼 지역의 이야기를, 요즘 자주 회자되는 로컬의 의미를 잘 담고 있고 구현 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그래서 경주의 재실을 찾아보게 되었다. 더는 재실을 방치하고 사라지도록 두는 것이 아니라, 소유자와 문중에서 동의한다면 문화공간으로서의 재실을 꿈꿔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문중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조상을 기리는 공간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조상들의 미담과 역사를 전할 수 있을 것이고 공간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 한옥의 모습과 함께 지역의 역사, 이야기를 듣고 알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이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많은 자본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문중을 설득할 수 있을 만한 확실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대신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을, 이렇게 기록이라도 하고 남겨둔다면 분명 의미있는 일이 생길거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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