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수관의 수줍음과 우리다운 거리

[2부 수관의 수줍음] episode 03

by 지은

3. 수관의 수줍음과 우리다운 거리


강현을 다시 만난 날은, 삼월이 된 지 열흘쯤 지난 시점이었다.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나는 막연히 졸업 후의 미래를 그려보곤 했다. 정확히는 졸업을 한 이후에 다시 대학교를 찾을 나의 멋진 모습을 상상했다. 아마 학교의 요청으로 대기업 취업 꿀팁을 전해주는 단상에 서거나, 우수한 성적 덕분에 졸업식 대표 학생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졸업 후, 학교가 내게 건넨 첫 부탁은 기대와 달랐다. 새롭게 <수관학회> 학회장을 맡은 후배 유진이 ‘졸업한 선배가 이끄는 학회 시간’을 첫 세미나로 추진하고 싶다고 연락해 온 것이다. 학업을 마치는 것이 졸업의 의미라면, 이 부탁은 내가 아직 졸업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했다.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새로운 역할을 찾지 못한 대신, 학교 안에서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유진이 알려준 교양 강의실 202호의 복도에서 강현과 나는 다시 만났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 강현은 복도에 서서, 강의실 안을 온기 하나 없는 눈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202호에 가까워질수록 그가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볼까 두려웠다. 그러나, 내 인기척을 느낀 강현이 나를 향해 돌아봤을 때, 그는 특유의 냉철한 표정 대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심한 나는 강현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의 손에는, 파란색 케이스에 금박 문구가 새겨진 ‘졸업장’이 들려 있었다. 그걸 통해 나는 두 가지를 알 수 있었다. 하나는 강현도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강현은 왜 졸업식에 가지 않았을까?) 다른 하나는 우리 둘 다 오늘, 각기 다른 시간에 학과 사무실에 들러 졸업장을 받아왔다는 사실이었다. 일 년을 휴학한 20학번인 나와, 이 년간 군대에 다녀온 19학번 강현은 같은 해 같은 날, 조금씩 어긋난 시간 속에서 각자의 졸업을 맞이한 셈이었다.

그렇게 학교 안에서 여전히 할 일이 남아 있는 가짜 졸업생 두 명은, 졸업한 날에도 <수관학회> 강의실 단상에 섰다. 마지막 역할을 다하고, 비로소 진짜로 졸업하기 위해서.

강현과 내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유진이 강의실 안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강현 선배, 세진 선배 오셨군요. 너무 고마워요."

"에이 유진아. 무슨 소리야. 당연히 와야지."


삼 월 둘째 주에는 언제나 캠퍼스 곳곳의 강의실마다 저마다의 기대가 뒤엉킨다. 유진의 손에 이끌리듯 들어간 학회 세미나 실 202호에는, 놀랍게도 마흔 명가량의 신입 부원들이 그런 마음을 지니고 앉아 있었다. 아마도 유진이 소위 말하는 ‘인싸’라 가능한 일이다. 활발하고 적극적인 유진은 아마도 신입생 환영회에서 꽹과리를 치거나, 경품을 걸며, 단숨에 지루한 <수관학회>를 인기 학회로 바꾸었을 거다.

몇 없는 친한 후배의 부탁으로 오기는 했지만, 사실 우리를 부른 건 유진의 실수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강현을 잘 안다. 강현이 이끄는 시간은 언제나 모두를 노트북 앞으로 도망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202호 강의실에 앉은 자들의 기대는 강현의 지루한 언변에 머지않아 고꾸라질 것이다. 마흔 명의 신입 부원은 이제 <수관학회>가 얼마나 지루한지 깨닫게 될 것이고, 그중 현명한 몇몇은 노트북으로, 심지어는 강의실 밖으로 도망가겠지.


나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현은 내가 오 년 간이나 매해 들었던, 그토록 익숙한 멘트를 뱉기 시작했다.

“수관학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수관학회는 식물을 관찰하며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을 배웁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고, 의견을 나누며 함께 배우세요.
식물에 삶이 있습니다. 우리는 식물에서 삶을 배워야 해요.”

아. 나 이거 들은 적 있지. 내가 좋아하는 영국 락밴드 '실버베일'의 내한 공연을 3일 연속 갔을 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멘트를 줄줄 읊는 걸 보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그때의 기계적인 멘트처럼, 강현 역시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역시 강현도 졸업했지만, 변한 게 하나 없구나.


이어지는 첫 세미나 주제 발표에서, 나는 그간 학회원들이 가장 열정적이었던 <생장과 계절>이나 <번식과 경쟁> 주제를 강현이 선택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도 그 정도라면, 노트북을 덮는 회원들도 간혹 있었고, 나도 선배로서 해줄 말이 많을 테니까. 나는 마치 시험지를 받아 든 우등생처럼, 자신 있는 문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완벽하게 답하면, 처음 보는 새내기들에게 그럴듯한 졸업 우수생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강현이 꺼낸 주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강의실에 연결된 모니터를 킨 강현은, 검색 창에 'crown shyness'이라고 입력했다. 강현이 보여준 스크린 화면 속에는 나무들이 있었다. 그 나무들은 가지의 끝에서, 서로 닿지 않으려 살짝 몸을 비틀고, 가지와 잎사귀 사이에 보이지 않는 틈을 남겨 두고 있었다. 서로를 피하듯 조심스레 퍼져 있는 그 간격 속에서, 한 그루 한 그루는 고유의 숨결을 지키며, 마치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서로를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한 걸음 물러서는, 겁 많지만 조심스러운 그 거리감이 오히려 숲 전체를 평온하게 만들고 있었다.


Canopy-shyness-Thumbnail.png 강현이 보여준 crown shyness 현상


강현은 잠깐의 시간을 두고 질문했다.

“이게 뭔지 아나요?”

명랑한 후배 하나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브로콜리 같아요!”

듣고 보니 브로콜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죠? 정답입니다.”

강현의 능청스러운 말투에 강의실 안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시 만난 강현은 낯설 정도로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능숙하게 학회를 이끌고 있었다. 부드럽게 분위기를 풀면서도,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지 않는 그의 진행 방식에 모두가 자연스럽게 집중했다.

강현은 미소를 띤 채 설명을 이어갔다.

“이건 ‘수관기피 현상’이라고 합니다. 나무의 가장 윗부분, 즉 수관—나무의 모자, 왕관이라고 부르죠—에서 가지와 잎이 서로 겹치지 않으려 떨어져 있는 현상이에요. 영어로는 ‘crown shyness’ 그러니까 ‘수관의 수줍음’이라고 합니다. 이 현상이 나타나면, 아무리 빽빽하게 들어선 큰 나무 숲이라도, 햇빛이 틈새로 들어와 숲 깊숙이 비치게 되죠. 식물들이 빛을 독점하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골고루 이용하는 배려 있는 방식인 셈입니다.”

평소 동물에 관심이 많던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여러분, 사실 저 현상은 펭귄에게도 있어요.”

유진은 이번에 펭귄 군락을 검색했다. 그녀가 보여준 사진 속 펭귄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자신의 영역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는 펭귄은 항공에서 내려다보면 서로 엄격한 거리를 두고 있다며 유진이 덧붙였다. 유진이 보여준 기하학적인 패턴이 보는 이를 압도했다.


040418_DG_penguin_feat.jpg?fit=860%2C460&ssl=1 유진이 보여준 펭귄 군락


또 다른 후배가 이어 말했다.

“번식 욕구만 있을 줄 알았던 식물이나 동물이, 일정 거리를 두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다니. 인간보다 낫네요.”

강현은 장난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맞아요. 나무와 동물에서 보이는 패턴이, 우리 삶보다 낫다니 참 신기하죠. 그럼 이 현상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요? 지난 코로나 시기에 인류가 서로 일정 거리를 둔 덕분에 살아남은 일이나, 혹은 일상 속 다양한 관계에서 균형과 배려를 찾는 순간에서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연결할 수 있겠죠.”

이제 강의실 안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가득 찼다. 누구 하나 지루해하지 않고, 각자 마음속에서 패턴을 찾아보며 수관의 수줍음을 음미하고 있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강현은 이어 말했다.

“수관학회는 이런 곳입니다. 식물을 시작으로, 여러분의 삶과 일상이 성장하는 공간이죠."

그때 갑자기 유진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덧붙이고 나섰다.

"그래서 멋진 곳에 합격하셨잖아요. 선배님~?"

"맞아요. 저는 이 학회에서의 육 년 간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배움을 얻었어요. 그리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 A제약사 연구원으로 입사했습니다."

몰랐던 사실에 세진의 눈이 커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강현은 이어 말했다.

"여러분에게도 이 학회에서의 경험이 도움이 될 겁니다. 학술적으로든, 일상적으로든, 어떤 배움을 남기고 떠나시길 바랍니다.”

강현은 수관학회에 교훈을 남기고, 입부 시 혜택도 한 줄 완성하며, 신입 부원들이 반할 정도로 멋진 선배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달리 강현은 멋지게 졸업했다는 사실을.


그때, 강현이 처음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생각도 그렇지, 세진?”

그러나 나는 그저 웃을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만이 아직 졸업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때문도, 멋들어진 말을 따라 할 수 없어서도 아니었다. 강현이 고른 주제는, 마치 내 오래된 고백에 대한 답인 듯 느껴졌다.

‘수관의 수줍음처럼. 우리는 적당한 거리가 있는 관계가 좋은 것 같아. 네 생각도 그렇지, 세진?’

아. 그러니까 다 성장한 강현은, 내 가지와 일정한 거리를 두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직하고, 명료한, 강현다운 거절이었다.




· 이 이야기는 현대 가족의 서사를 담은 허구의 소설로, 모든 인물과 사건은 작가의 상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본 작품은 1부 〈한강에는 금붕어가 산다〉, 2부 〈수관의 수줍음〉, 3부 〈해묘 군락〉으로 이어지는 연작 소설입니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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