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함 명상 에세이, 21일 루나 디톡스 #15
집을 나와 익숙한 길을 걷는다. 흐린 하늘. 온도에 잘 맞게 입은 것 같다. 문득 걸치고 나온 겉옷이 언제 산 거였나 싶었다. 구매 시기는 대충 기억이 난다. 단순 뺄셈인데 사고가 느려진다. 15년이나 지났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났지.
팔을 들어 소매를 살펴본다. 얼룩이 진 곳도 없고, 실이 삐져나온 부분도 없다. 튼튼하기 그지없다. 봄가을에 입기 딱 좋은 약간 도톰한 면 소재의 자켓이다.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모자가 달려있다. 허리 부분엔 리본 모양으로 단추가 박혀있어, 뒤에서 보면 귀엽다. 일자가 아니라 A라인으로 떨어지는 옷이어서, 비슷한 모양의 치마와 입기에도 좋다. 이 옷을 샀을 때는 한참 레깅스가 유행하던 때여서, 반팔에 긴 원피스와 레깅스, 앞코가 뾰족한 빨강 땡땡이 플랫 슈즈를 신고 이 자켓을 입곤 했었다. 봄에 그렇게 입고 밖에 나가면 기분이 좋았었다.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는지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옷들이었고 나와 잘 어울리는 옷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어울리지 않게 되기도 했고 다른 옷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 옷들 중 하나가 여전히 함께라니 새삼 놀라웠다. 좋아하니 버리지 않았고, 잘 보관하면서 쭉 입었는데 벌써 15년이 지났다니!
디자인도 마음에 들지만, 편안하고 관리하기 쉬운 소재이기도 하다. 오래 입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부분도 좋다. 이 옷을 입어서 더 기분이 좋을 때도 있고, 나답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몇 번 잃어버릴 뻔한 적도 있었다. 그중 한 번은 작년 봄이었는데, 이 옷을 입고 나가서 카페에 두고 다른 곳으로 갔다. 저녁이 되어서야 옷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두고 갔을 만한 곳이 카페밖에는 생각나지 않아서 전화해 봤는데, 다행히 옷이 있었다. 이동한 곳은 카페로부터 한 시간은 넘게 가야 있는 곳에 있었다. 이젠 이별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 찾아와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거의 마감 시간에 맞춰 가서 찾았을 때, 안도감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자켓 말고 그렇게 찾아온 옷이 하나 더 있다. 가디건이었는데, 발리에서 요가 지도자 과정 수업을 오갈 때 아침저녁에 걸치는 용도로 입었었다. 수업하는 곳에 흘리고 온 걸 나중에 알았는데, 나중에 다시 가 보니 그곳에 있지도 않았다. 수업을 했던 곳은 호텔이었다. 해외이기도 하고 직원들이 옷이나 물건을 몰래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고 해서 찾지 못할 줄 알았다. 혹시 몰라 같이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에게 본 적 없냐고 했더니, 뒤늦게 - 한국에 돌아온 뒤에 - 누군가가 자기 짐에 섞여있었다고 하며 보내주겠다고 했다. 호주에서 온 사람이어서, 호주에서 한국으로 보내주었다. 그 얘기를 들은 지인이 문득 얘기했다.
"가져갈 마음을 먹고 가져간 거네요. 브랜드 옷이었다면서요? 비싼 건 줄 알아보고 가져간 거지."
그렇게까지 생각해야 할까 싶었지만, 일리가 없지는 않았다. 자기 옷이 아닌 걸 애초에 가져올 이유가 없고, 섞여 있었다고는 했지만 랩 가디건이어서 부피도 없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섞여 있는 것을 모르고 있기는 어려웠을 텐데. 배송비를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아니라면서 자기가 부담하겠다고 했다. 배려였는지 죄책감에 그랬는지는 묻지 않았다. 받으면 될 일이었으니까. 자켓을 찾으러 갔을 때처럼.
그 가디건도 13년 정도 입고 있다. 맥시멀리스트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물건이나 옷은 가지고 있는 걸 보면 미니멀리스트도 아니다. 중요한 건, 좋아해서 가지고 있다는 거다. 남들이 보면 맨날 저 옷, 맨날 저 물건 싶을 수 있겠지만 나한텐 그렇지 않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며 흐른 시간만큼의 나를 목격해 준 고마운 이들인 것이다. 오래 함께 한 사람 친구와 다르지 않다. 물건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소중함을 느껴야겠냐고, 좋은 거 새로 사서 입으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좋은 새 옷은 그 옷을 대체할 수 없다. 모양과 색깔과 소재가 다 같은 것이라도.
생각한다. 그렇게 소중하게 물건이나 사람을 대하는 사람과, 쓰고 버리기의 빈도수가 훨씬 높은 사람의 삶은 다르다고. 우열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각과 기분으로 살아가는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자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시기가 지금인 것도 어느 정도는 맞다. 가급적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기, 줄이기가 너무나 중요해졌으니 말이다.
옷만 보더라도 패스트 패션이 트렌드로 나타난 이후로 한층 더 옷 소비와 폐기가 많아지지 않았는가. 따지고 보면 그렇게 많은 옷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와이드 팬츠가 유행한다고 광고에 나오니 입고 싶어서 사고, 어울리는 윗옷이 없으니 상의도 새로 사고, 한 가지 색으론 부족하니 다른 색깔로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또 산다. 유행이 바뀌면 또 다른 스타일의 바지를 사고, 또 유행이 바뀌니 다른 옷을 사야 되는데 통장 잔고는 부족하고, 옷장에 옷은 넘치는데 입을 옷이 없다는 말을 계절마다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옷을 사는 데 드는 돈을 벌기 위해 내가, 또는 타인이 어떤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옷을 만들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인지, 그들의 노고와 시간까지도 들여다보면 옷을 살 때도 고민이 되기도 한다. 버리기 역시 쉽지 않아 진다.
이렇게 여러 부분들을 면밀히 살피다 보면 감사한 부분들이 저절로 찾아진다. 고맙게 느끼다 보면, 장밋빛 하루가 펼쳐지기보다는 조금은 진중한 태도로 하루를 보내게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런 진지함이 무겁게 느껴져 싫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타인과 나, 동식물과 자연을 포함해 옷과 같은 물건까지 존중하다 보면, 그런 상태에서는 더 소중한 시간을 보내게 되지 않을까. 내 안에, 그리고 주변에서 무언가는 바뀌지 않을까. 나를 더욱더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사람들을 위해서, 자연을 위해서 뭔가 하나라도 더 하고 싶은 게 생기지 않을까. 그걸 업으로 또는 취미로 한다면 사는 게 또 얼마나 더 재미있고 가치롭게 느껴질까.
환경은 과거보다 좋지 않은 상태에 있고, 살기도 힘든 시대라고 많이들 얘기한다. 하지만 뉴스는 언제나 환경이 위기에 있고 지금이 가장 좋지 않은 시대라고 얘기해 왔다. 그런 이야기를 매일 접하고 사람들과 나누면서 우리는 선대의 선대, 그리고 훨씬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살아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부정적인 흐름으로 가는 대신, 삶이라는 배의 키를 잘 잡고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경이로움으로 흐름을 바꿀 수 있다. 나의 옷에 대해서도 태도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 나의 삶에 한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나와 나와 나가 모여 우리가 되는 공동체의 운명도 그 흐름을 바꿀 수 있다.
마음에는 제한이 없어서, 무엇 하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다른 것도 그렇게 여길 수 있다. 이것 다르고 저것 다른 것이 꼭 아니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정말 마음먹기에 달렸다. 오래 곁에 있어준 나의 옷에 감사함을 느끼면서, 나는 또 한 번 물건 하나도 소중히 여기는 나를 좋아하게 된다. 그런 소중한 마음을 나누고자 글을 쓰는 나 자신의 노력을 인정한다. 그리고, 시간을 내어 글을 읽고 명상을 하는 여러분에게 감사하게 된다.
우리는 매일, 귀한 시간과 마음을 나누고 있다. 그것은 무언가를 매일, 함께 일정 기간 이상 같이 하는 행위와 같이 해온 대상에 대한 인식과 마음 없이는, 다 알 수 없을 어떤 것이다.
* '재킷,' '카디건' 이라고 쓰는 것이 맞다고 맞춤법 검사가 알려주었지만 제가 부르는 명칭을 살려 썼습니다.
| 당신을 위한, 당신의 명상 |
오래 입은 옷이 있으세요? 어떤 옷인가요? 어떤 모양, 색깔, 소재의 옷인지 떠올려보세요. 지금 가져와 만져보고, 입어보고, 느껴보셔도 좋아요.
이 옷이 내게 와서 어떤 시간을 함께 했는지 떠올려보세요. 좋은 날 입었던 순간, 잃어버릴 뻔했던 순간, 수선해서 다시 살려낸 순간...
장면장면이 눈앞을 지나갈 때,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더 앞서, 이 옷을 사실 때 어떤 상황에서 사셨는지 (또는 선물을 받으셨거나 데려오셨는지) 기억에서 잘 찾아보세요. 이 옷은 어떤 사람들의 손을 거쳐, 얼마의 시간을 들여,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돌아보세요. 옷 안에 붙어있는 상표의 정보를 보면서 생각해 보셔도 좋아요. 원산지, 소재 등등. 생산 과정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세세히 알 필요는 없지만, 조금만 생각해 봐도 가늠이 돼요. 그동안 읽거나 들었던 뉴스 기사, 또는 인터넷 검색을 활용하셔도 좋죠.
좋아하는 옷에서 옷을 만든 사람들, 옷을 만드는데 소비된 에너지 자원, 그리고 옷을 만든 소재를 제공해 준 자연이 보이시나요?
이 모든 것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 충분히 느껴보세요.
하트를 꾸욱 눌러 출석 도장을 찍으세요. 좋아하는 옷이 있는 나의 방에서, 편안한 밤 보내시기 바랍니다.
찾아내신 보물 같은 감사함은 댓글로 나누어주셔도 좋습니다. 저에게는 연재를 이어가는 힘이 되고, 다른 독자 분들에게는 이런 부분에도 감사할 수 있구나, 하고 시야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