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지우 Feb 06. 2023

삶은 여기에서 누리는 것

Unsplash의Priscilla Du Preez


살다 보면, 자꾸 여기에서 탈출하고 싶고, 더 큰 이상을 좇고,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싶어진다. 돈을 더 벌면, 직장을 옮기면, 새로운 무언가를 얻으면 더 멋진 삶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마음은 우리에게 흔히 말하는 '자기계발'을 하도록 북돋아준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어느 지점을 넘어서서 삶을 덮어버리기 시작하면, 그 삶은 어떤 의미에서 '끝난 것'이나 다름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인생이란 자꾸 어디로 더 가면, 더 좋은 게 있을 것만 같지만 꼭 그렇진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돌이켜 보면 볼수록, 어딘가로 간절히 가고 싶었던 날들 속에도 그 시절을 사랑할 만한 구석이 있었다. 오히려 매시절은 그 자체로 고유하여서, 어느 시절이 딱히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듯하다. 삶은 매시절 오늘 누려야만 하는 것이지, 어디 가서 따로 누리는 건 아니다.


어린 아이일 적에는, 어릴 때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있다. 그 시절이 지나고 나서 아무리 모래를 열심히 파거나, 바다에 뛰어들거나, 목청껏 노래 부르더라도, 그 시절과 같은 행복을 돌려받을 수는 없다. 청소년기 때는 그 시절 좋아할 수 있는 음악이나 문학이 있다. 청년일 적에는, 그때만 느낄 수 있는 밤과 새벽과 여름의 느낌 같은 것이 있다. 그것들은 언젠가 50대의 강남 땅부자가 되더라도, 그때는 결코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아직 어린 아이와 무한한 공상의 세계를 말로 주고받으며 깔깔대는 일은, 언젠가 자가 아파트에 사는 중년 아저씨가 되었을 때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일이다. 이 시절은 이 시절의 일로 끝난다. 아직 젊고, 아직 건강하고, 아직 아이가 어리고, 아직 셋이서 꼭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시절은 이 시절로 끝이 난다. 그때 가서 무언가 이루었다며 기세등등하게 다시 타임머신 타고 돌아올 수는 없다. 그냥 이 시절 사랑하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3년 간의 수험생활이 끝나고, 펑펑 울었던 적이 있었다. 다른 것보다도, 아직 어렸던 아이와 충분히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것 같고, 함께 있을 때도 계속 공부를 하느라 충분히 마음을 써주지 못했던 것 같아,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그 시절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주말에 나들이를 가고, 하루 한 시간이라도 가족과 시간을 보냈던 그 시간들 만큼 잘했다고 느껴지는 게 없다. 


마찬가지로 절실했던 그 시절,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한달에 한두번이라도 저녁의 독서모임 같은 것을 했던 일도 참으로 잘했다고 느낀다. 그것이 내가 그 시절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것을 하지 못했다면, 훨씬 아쉬운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 부산의 사람들과 아내와 함께 보냈던 그 날들이 없는 그 시절의 삶이란 얼마나 공허할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니 언제나, 최선을 다해 매시절을 사랑해야 한다. 


아마도 사람이란 늘 다음 시절을 준비하며 살아가게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또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이 시절을 통째로 잃는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일도 없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이 시절을 사랑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매시절 그러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이들어 있을 것이다. 하나뿐인 이 삶을, 꽤나 잘 사랑한 것으로 기억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실패로 점철되었던 지난 인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