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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실로 사랑하는 것

by 정지우

대개 지나고 나서야 알게되는 것이지만, 우리가 무언가 끝나지 않을거라 믿는다면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대학교 캠퍼스의 푸르게 물들어가는 선선한 저녁의 느낌,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새하얀 모래사장에서 발 담그는 모습, 사랑하는 사람과 고기를 구워먹으며 마시는 주말이 당연히 내일도 이어질 거라 믿을 때, 우리는 그것을 무엇보다 좋아하고 있을 수 있다.


그저 이런 저녁의 느낌은 내일도 이어질 것이고, 내 앞의 이 소중한 존재도, 풍경도 그저 내일로 계속 존재할 거라 막연히 믿는다. 밤마다 책을 읽는 시간이나 글을 쓰는 새벽이 내일부터 당장 사라질 거라고는 믿을 수 없다. 그런데 그 막연한 믿음, 나도 모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들이야말로, 내가 그것들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아이는 부모의 존재를 매우 당연하게 믿지만, 그것을 아주 격렬하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더 격하게 좋아한다. 새로운 장난감이나 새로운 키즈카페를 가장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은, 자기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모든 것일 것이다. 지나고 나면, 당연했던 시절, 존재, 마음, 안정감들이 가장 그리운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무언가 끝나지 않는다고 믿을 때, 우리는 마음을 그 믿음에 내어준다. 내가 이 믿음 속에서 안심해도 되겠구나, 이 믿음 속에 있어도 되겠구나, 하고 마치 자기 둥지를 믿는 어린 새의 마음이 된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은 '끝난다'라는 진실을 알게 되는 어느 순간, 과거의 그 마음이 사무치게 그립곤 하는 것이다. 그 시절, 내가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좋아했는지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얻고자 안달하는 것, 성취하고자 초조한 것, 놓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 쫓거나 쫓기는 욕망의 대상들은 사실 지나고 나면 오히려 별 게 아닐 때가 더 많다. 뭐하러 그런 것에 그렇게 사로잡혔을까 싶다. 마치 가장 행복한 마을을 두고 수평선 너머를 꿈꾸다가 바다에 표류하는 모험가처럼, 우리는 당연한 것의 가치를 잘 모른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게 여기 있다는 걸 잘 모른다.


얼마 전, 아내랑 아이와 셋이서 돼지갈비를 먹고 돌아오는 저녁, 한 청년이 선선한 저녁 아래에서 숯불을 구우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잃어버린 청춘의 저녁 같은 것이 생각났다. 또 다른 날에는, 밝아오는 새벽에 눈을 떴는데 매일같이 밤을 새며 좋아하던 청춘 시절의 새벽이랄 게 기억났다.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너무 당연했는데, 어느덧 나는 다른 삶으로 와 있다. 여기 있는 것들, 아침마다 아이를 보내는 등원 시간이나, 금요일 저녁 우리에게 익숙한 동네 식당이나, 당연하게 산책하는 공원들이야말로 가장 그리울 것이라는 것을 또 알 것 같다.


가장 소중한 건 당연하지 않았던 일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당시 너무나 당연했던, 가족이 둘러 앉아 수박을 먹고, 월드컵을 보고, 강아지와 산책하고, 함께 손을 잡고 걷고, 함께 누리던 일상들이 가장 소중하게 남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한 것을 가장 좋아할 줄 알아야 한다.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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