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지우 Nov 30. 2023

퇴사와 아이의 아침밥

퇴사를 하고 아침마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있다. 등원 시간을 한 시간 미루면서, 미역국, 콩나물국, 설렁탕 같은 것에 밥을 말아준다. 추운 겨울 날, 일찍 유치원에 가는 아이를 위해 따뜻한 밥 한 공기 먹이고 보낼 수 있다는 게,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의식처럼 느껴진다. 그전까지, 어두컴컴할 때 일어나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아이에게 빵 한 조각 같은 거 먹이고 서둘러 나가던 아침이 아니라, 다소간의 여유 안에서 맞이할 수 있는 아침이 참으로 좋다.


회사를 가지 않긴 하지만, 사실 일이랄 것은 더 많아진 것 같기도 하다. 퇴사와 동시에 스스로 벌인 일들도 많고,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제안들도 있다. 겨우 며칠 지났지만, 개업했다고 하니 법률 상담을 하고 싶다는 분들이 벌써 여러명 있기도 하다. 하루는 더 바빠졌지만, 그래도 여유 있게 시작하는 아침이 그 모든 걸 상쇄한다. 저녁에 지옥철에 실려 퇴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달라졌다고 느끼게 된다.


회사 생활을 하며, 무엇보다 가장 끔찍했던 건 퇴근길의 지하철이었다. 승강장에 들어가면, 매일 열차를 두세대 보내는 건 기본이었다. 그러다 겨우 끼여서 타면, 옴짝달싹 못할 정도인 상태에 실려 가게 되고, 때론 땀이 비오듯 하거나, 공황장애 비슷하게 가슴이 답답하여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루의 기력 중 절반쯤은 퇴근길에서 다 빼앗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시간을 버텼던 건 거의 필사적으로 읽었던 전자책 덕분이었다. 내게는 매우 비인간적이었던, 그 출퇴근을 벗어난 게 일단 '살았다.'라는 느낌을 준다.


퇴사를 하고 맞이한 첫 주에서 겨우 사나흘 정도 지났지만, 체감상으로는 몇 주는 지난 것 같다. 삶이 새로운 여정으로 접어드니, 그만큼 부산스럽고 몽글몽글 욕조를 넘쳐 피어오르는 거품들 같은 희망과 꿈, 걱정과 고민, 격려와 인연 같은 것들이 가득하다. 이를테면, 나흘 동안 오전, 오후, 저녁, 밤에 한 일들이 모두 제각각이라 약간 아찔한, 어지러움도 든다. 회사 다닐 때의 그 단조로움과는 다른, 삶의 여행에 접어든 듯한 묘한 기분을 느낀다.


오전에는 유튜브를 한 번 찍어보고, 오후에는 형사 사건 상담을 하고, 의견서 검토를 하고, 저녁에는 글쓰기 수업을 하고, 또 어느 오후에는 의뢰인을 만나러 가고, 어느 점심에는 변호사를 만나고, 어느 오전에는 청탁받은 원고를 쓰고, 어느 오후에는 또 방송 촬영을 가고, 다시 어느 오전에는 민사 사건 상담을 하고, 또 어느 오후에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어느 저녁에는 강연과 방송 제안과 상담 요청을 받고, 다시 어느 밤에는 아이의 두 번째 치아를 뽑고, 그런 것들이 사나흘 사이에 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일 하나하나가 나의 자율성에 따라 나의 흐름으로 나아가는 일처럼 느껴져, 그 부산스러움에 어딘지 기분 좋음이 있다. 이것이 더 나의 삶에 충실하다는 느낌을 준다.


아마 이 새로운 삶도 차차 자리를 잡고, 루틴과 형식을 갖추어 갈 것이다. 그 가운데 나는 계속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도 잊지 않으려 애쓰려 한다. 이를테면, 아침에 아이의 밥을 챙기는 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계산 없이 수다를 떠는 일, 나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사람들에게 충실하는 일, 나에게 삶을 맡기고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 믿는 사람의 마음에 응하는 일, 그런 것들이 다른 욕망과 욕심, 지나친 바쁨 같은 것들에 삼켜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을 것이다. 겨울의 투명한 공기처럼, 투명한 마음으로 또 이 나날들을 뚫고 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밀이 갖고 싶은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