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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Jun 20. 2022

서로를 위해 울어주는 때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순간이 있다면, 서로를 위해 울어주는 때가 아닐까 싶다. 결국 모두가 떠날 이 삶에 대한 아쉬움을 이해하며, 서로 연민하고, 그렇게 서로를 위해 울어주기 위해 인간은 태어난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삶은 너무도 슬픈 것이고, 우리는 모두 잊고 잊힌다. 아이였던 시절, 삶의 모든 걸 사랑하면서 이 생을 시작하지만,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 따스함, 달콤함, 부드러움과 작별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인간다움을 지키고 싶어 애도한다. 삶을 망쳐버린 사람에 대해, 삶을 떠난 사람에 대해 안타까움이 들고 아쉬움이 든다. 때로는 애써 그런 마음을 느끼려 한다. 그런 마음에서 멀어질수록, 내가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것 같아서다. 고양이나 거북이를 지켜 주고 싶어하는 아이의 마음에 가 닿으려 애쓴다. 


반면, 증오로부터는 계속 벗어나고자 한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이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 일말의 여지조차 내 안에서 지워버리는 일은 나 자신에게도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악당조차 이해할 최소한의 여지가 내 안에 남아 있기를 바랄 때가 있다. 옳고 그름은 철저하게 가리되, 그렇다고 인간임을 포기할 필요 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능지처참하여 꼬챙이에 매달아 전시하고 싶은 마음 앞에서는 멈춰야 한다고 느낀다. 대신 그를 위해서도 흘릴 수 있는 눈물 한 방울은 남겨놔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그렇게 사랑과 따스함으로 넘쳐나는 사람은 못되지만, 그래도 종종 다른 누군가를 위해 울 때 내가 사람 같다고 느끼곤 한다. 어떤 영화를 보고 펑펑 울 때, 누군가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울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별하거나 다시 만나는 순간을 보고 울 때, 나도 인류에 속한 한 명의 인간이라는 걸 느낀다. 아이에게 억울해서 우는 법이 아니라, 사랑하고 연민해서 우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다. 아니, 이미 아이는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지만 말이다. 


여기저기서 안타깝게 삶을 마감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어찌 보면, 나와 관계 없는 사람들의 삶에 울어줄 이유는 없다. 누군가는 애초부터 이해나 공감을 거부하고, 그저 당연한 증오를 택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조금만 발을 뻗어 강을 건너면, 그곳엔 인간으로서 이해하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애도의 늪이 있다. 끊임없이 이해하는 사람들의 사회는 끊임없이 애도하는 사람들의 사회다. 어쩐지 나는 그런 사회에만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의 슬픔을 도외시하지 않고, 아주 잠깐 울어줄 수 있는 사람들의 사회, 그런 사회에만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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