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설 Jan 02. 2024

혼자 살아도 지구는 둥그니까

“사실 제가 말한 애인은 여자인데요.”

  여자인 한 내담자가 말했다. 몇 주에 걸쳐 애인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대해 얘기하는 중이었는데, 애인이 사실은 여자였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들으니 안타까운 마음부터 들었다. 내담자의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채 진행되는 상담은 그 효과가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연애사실을 부모님께 밝히지 못한 그녀의 속사정은 사실 부모님과 거리가 있어서만은 아니었고, 자신을 부정당하거나 비난받을까 두려워서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담자의 진짜 마음을 몇 회기가 지난 뒤에야 알게 돼서 아쉬웠다. 미리 알았더라면 내담자에게 더 적합한 단어를 골라 말하고 공감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퀴어라는 사실을 고백했을 때 상대방의 반응이 예측되지 않기 때문에 평소에도 숨기는 편이라고 했다. 그래도 상담소에 와서는 용기가 나서 말할 수 있었던 거라 덧붙였다. 그날로 나는 상담소 소개란에 ‘퀴어 프렌들리’라는 소개 글을 더했다.


  이전부터 그 문구를 올리고 싶었지만 사실 주저되었었다. 내가 성소수자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했거나 수백 명의 퀴어들을 만나본 것도 아닌데 저런 소개 글을 올려도 되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의 상담 이후 눈치 보지 않고 이야기해도 된다고, 환영한다고 써놓는 것만으로도 소외받기 쉬운 그들에게는 안도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글을 썼다. 그러고 나니 퀴어들이 더 많이 찾아오게 되었고, 첫 회기 시작부터 자신은 퀴어라고 밝히는 사람들이 늘었다.  퀴어 프렌들리라는 문구 덕분에 자신이 퀴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게 안전하다고 느껴졌다 했다. 그들의 태도가 당당하여 멋지다고 느끼다가도,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조차 내가 가진 편견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심스러워졌다. 이성애자가 자신의 애인이 이성이라고 밝히는 것이 당당하다 느끼지는 않을 테니까. 



  고백하자면 과거의 난 그리 퀴어 프렌들리한 사람이 아니었었다.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사람들 이야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홍석천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동성애자로 사는 고충을 이야기해도 ‘그렇구나. 힘들겠다.’ 정도의 생각만 스쳤고 내 마음이 함께 공명하거나 혹은 동성애에 더 관심이 생기진 않았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 중에는 퀴어가 없었고, 친구의 아는 사람 이야기로만 전해 듣거나 책이나 텔레비전 같은 매체에서만 접할 수 있는 남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리상담가가 되고 나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전에는 내가 만나지 않았던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오다 보니 그 중에 퀴어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세상 얘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과거에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취급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것이 질병도 아니고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1970년대부터는 정신장애 진단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성소수자여서 겪는 차별과 편견은 여전히 존재했으며, 그 사실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심리상담 도중 누군가가 퀴어라고 고백할 때 내 마음과 태도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는 사실도 알아차리게 됐다. 


  그러고 나니 퀴어 문화에도 더 많은 관심이 생겼다. 박상영 작가 소설과 같은 퀴어 문학을 읽고 퀴어 영화를 본다. 나에게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도 퀴어에 관심이 없었구나 하는 반성도 일었다. 그리고 세상에 이렇게 퀴어들이 많은데, 정말로 여태껏 내 주변에는 퀴어가 없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성소수자임을 밝혀도 안전할 거라는 인상을 내가 주지 못해서 밝히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면 내가 무지했고 미안하다고 이 지면을 빌어 용서를 구하고 싶다. 

 



  성소수자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소수 집단을 소외시키는 경우는 빈번히 발생한다. 얼마 전 새로운 카페를 오픈할 예정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공사를 하는 가게를 발견했다. 때때로 혼자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걸 즐기는 터라,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카페가 생길까 내심 기대하며 한동안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그런데 인테리어 공사가 끝나갈 무렵, 카페 문 앞에는 노키즈 존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걸 보니 가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유모차를 끌거나 아이 손을 잡고 잠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카페 앞까지 왔다가 노키즈 존이라는 문구를 보고 돌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허망하고 소외감을 느낄까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를 데리고 카페에 갈일은 없겠지만, 일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차별하는 곳에서 내 돈과 시간을 소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하고 소외시킬 때 당사자는 외로움과 고립감을 크게 느낀다. 반대로 어딜 가든 차별 당하지 않는다는 믿음은 우리에게 따뜻한 연대감을 느끼게 한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외로움을 경험하기 쉽다. 물리적으로 혼자 있기 때문에, 혼자라는 느낌도 쉽게 따라올 수 있기 때문이다. 1인 가구를 꾸리고 있는, 그래서 외로움에 더 취약할 수 있는 나부터라도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남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로 여기며, 더욱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겠다고. 그래서 우리 모두 외롭지 말자고. 

 



이전 10화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