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아포리즘_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아니 내가 삶을 오해한 걸 지도..

by 제이쌤

어느 가을 주말, 문득 엄마가 보고 싶어 쌍둥이만 데리고 친정 나들이에 나섰다. 큰 아이는 시험기간이라 스터디카페에 갔고, 남편은 그냥 두고 훌쩍 가볍게 다녀오고 싶었다. 같은 경기도인데, 서울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야 하는 거리기에 막히면 두 시간도 걸리는 거리다. 일요일 오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숨 막히게 막혔다. 좋지 않은 컨디션에 장시간 운전이 힘들었지만, 잠시 엄마품에 머물다와도 좋았다. 소파에 앉아있는 나에게 엄마가 깎아다 주신 사과에 한참을 머물러있었다. 누가 나를 위해 이렇게 마음을 써준다는 안도감. 거창한 음식이 아니라 이런 과일 하나라도 그 마음에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거구나 새삼 깨닫는다. 엄마가 있어서 좋다.


아흔이 넘으신 시어머니를 지금껏 모시고 사는 우리 엄마. 당신 어머니를 끔찍이 여기시고, 그런 본인의 엄마를 평생 군소리 없이 모시고 사는 아내를 또 더 끔찍이 아끼시는 우리 아빠. 엄마는 평생 일을 하시다가 요즘 좀 쉬고 계신다. 오래 쉬시지 않고 곧 다시 일을 하실 분이시기에, 짧은 휴식 기간이시다. 이틀에 한번 쉬시는 아빠랑 쉬는 날마다 두 분이서 점심 한 끼는 맛있는 걸 사드시러 나가신단다.


며칠 전 아이들 모두 등원시켜 보내고 엄마께 전화드렸더니, 드륵드륵 시끄러운 잡음이 들린다. 아빠가 과일 껍질을 갈고 계신단다. 화초 좋아하는 엄마한테 추석에 사드리고 온 화분들에 비료를 만들어 주시겠다고 그러고 계신단다. 아직 두 분 모두 일도 하시고 가끔 티격태격도 하시고 맛난 것도 먹으러 다니시며 큰 걱정 없이 살아가시는 모습이 감사하다. 아주 여유롭지 않으셔도 괜찮아 보이신다. 두 분 다 조금씩 아픈 곳이 있지만 나이 들어감에 당연하게 받아들이신다. 한 번은 엄마께 아빠가 이제 그만 일하고 쉬는 게 어떠냐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하셔서 엄마가 눈물을 보이셨단다.


내가 이루고 싶은 '부'와 '평화'도 딱 그만큼이면 될 거 같다. 큰 부자가 되어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일주일에 소소한 외식 몇 번 할 수 있는 그 정도의 부. 독립하고 싶은 열망이 있는 나는 곁에 늘 함께하는 누군가 없더라도 가끔 만나 좋아하는 책 얘기, 꽃 얘기 나눌 사람들이 있는 정도의 평화.



쇼펜하우어의 아포리즘을 읽고 있다.

'당신은 왜 인생이 고통스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말이 뼈 아프게 다가왔다.


마흔은 되어야 삶을 볼 수 있다더니, 마흔부터 마주하는 삶의 여기저기에 고통이 널려있는 게 보이는 걸 보니 그 말이 맞나 하고 생각 중이었다. 된 하루의 끝에는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살아내자' 생각했었는데, 속인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오해했다는 생각을 더 많이 게 되는 요즘이다.


결혼은 상호희생과 헌신이 불가결한데 자발적으로 이러한 자기부정에 동의해 놓고 나를 잃어감에 슬퍼하고, 그 결혼의 결실인 자식에게 잃어버린 나를 투영시켜 나를 찾으려 하기에 자식을 독립시키는 게 어려운 일이라 한다.


결혼이라는 게 희생과 헌신 위에 쌓아 올려지는 탑 같은 거라는 사실. 삶이 내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 적 없다. 그저 내가 외면했을 뿐. 그래서 내 희생과 헌신만 더 크게 느껴지고 억울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결혼이란 그런 건데 말이다. 결혼에 대한 책임으로 헌신과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살아내시는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보며 나의 삶을 돌아본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행복을 손에 넣고 싶다면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 되어서는 안 된다... 행복은 수단을 통해 달성되지 않는다. 어떤 목표를 향해 의지의 실천을 했을 때 길의 중간에서 우연찮게 얻은 물 한 모금 같은 것이다. 깃발이 꽂혀 있는 종점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다. 그 깃발을 손에 넣기 위해 어디선가,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실천하고 있다면, 그의 삶은 진정한 행복을 만끽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행복은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행복은 그저 널려있는 고통들 중간중간에 우연히 마주하는 찰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꾸 잊어버려서 자주 상기하기 위해 애쓴다.


엄마가 깎아주신 사과에,

새 잎이 돋아난 화초에,

학교에서 즐거웠던 일을 이야기해 주는 아이의 미소에,

끊지 못해 살을 못 뺀다는 내 사랑 떡볶이에,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 사이사이에 널려있다. 행복처럼 고통도 그저 널려있을 뿐.

그런 게 인생이라고 나의 마흔 주위의 많은 것들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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