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_소설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by 제이쌤

역사에 외면당한 재일조선인 가족 4대에 걸친 대서사극이다. 재미교포인 이민진 작가가 30년에 걸쳐 집필한 소설이다. 주인공 선자의 일생을'견뎌냈다'라는 단어 말고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언청이에 절름발이였던 선자의 아버지는 현명하고 따뜻한 사랑을 선자에게 주었다. 그런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그녀의 어머니 양진 또한 선자를 귀하고 단단한 여자로 성장시켰다. 그 부모의 단단한 사랑은 견뎌내야 하는 선자의 고단한 삶 가운데 시시때때로 버팀목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조선은 기울어가고 있었다. 조선은 굶주리고 있었다.

그 시절 가장 좋은 신붓감은 적게 먹고 일 잘하는 여자였으며, 소녀들은 국수 한 그릇에 몸을 팔아야 했으며, 노인들은 입 하나라도 덜라며 길거리로 스스로를 내던지는 시국이었다.



이 소설의 제목 <파친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생이 파친코 게임과 같다고 믿었다. 다이얼을 돌려서 조정할 수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로 생긴 불확실성 또한 기대한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모자수는 고정돼 보이지만 무작위성과 희망의 여지가 남아있는 파친코를 왜 손님들이 계속 찾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주어진 환경과 시대는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으면 된다.


그런 환경에 던져진 선자를 비롯한 책 속 인물들은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견뎌내는 삶을 살아낸다. ​​


한수가 유부남인지 알지 못하고 사랑에 빠져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친 선자는 임신을 하고, 그 소식을 한수에게 전한다. 한수는 일본에 아내와 세 딸이 있다며 결혼할 수 없다 말한다. 그러나 너와 아이를 책임지겠노라고 한다. 첩으로 살아가는 일보다 참기 힘들었던, 사랑을 나눈 사람의 배신에 몸서리치며 한수를 떠난다. 그러던 중 운명처럼 독실한 기독교인 목사 이삭과의 인연이 닿아, 오사카로 건너가게 된다. 그곳에서 이삭과 그의 형 요셉의 그늘 아래서, 고단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두 아들을 키우내며 살아낸다.


어느 새벽, 타국 하늘 아래 어머니 양진과 함께 앉아 두 아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선자는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를 덕희, 복희 자매를 떠올린다. 어머니의 하숙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그 고아 자매는 선자와 친 자매처럼 지낸 사이였다. 그녀들은 아마 식민지가 된 부산에 남아 군인들에게 끌려가 말할 수 없이 힘든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생면부지 타지인 일본에서 살아낸 그녀의 삶도 녹록지는 않았으나 그녀들에 비해 선자는 복 받은, 운 좋은 사람이다.


목사였던 선자의 남편 이삭은 늘 말했다. 왜 어떤 이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고통받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고. 그들이 고통받을 때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신에게는 늘 계획이 있다고 말이다.


선자의 삶에도 불운이 그녀를 덮쳤던 날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 시대를 견뎌야 했던 조선인들은 도처에 널린 이 불행들이 나를 비켜가 주기를 매일 희망했을 것이다. 언제가 잭팟이 터질지 모르는 불확실하나 존재하는 희망을 매일 바랬을지 모른다.


평생 선자와 아들 노아의 곁을 맴도는 한수는 어떤 인물일까. 선자는 한때 목숨을 바칠 만큼 한수를 사랑했다. 한수는 선자를 사랑했을까, 이용했을까.

한수를 좀 더 이해해 보고 싶었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소설 속 인물들을 깊이 이해해 보고 싶어서이다. 그래서 쉽지 않지만 몇 년째 <토지>꾸준히 읽어가고 있기도 하다. 토지 속의 모든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악인은 없다. 물론 욕심에 살인을 저지른, 그런 절대적 악인은 존재하지만, 그 외 대부분의 인물들은 그럴만한 이유들로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들로 묘사되어 있다. 그 안에서 삶을 배워간다.


한수는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어떤 사연을 가진 인물일까. 책에는 한수에 그런 부분은 묘사되어 있지 않았으나 애플티브이의 드라마에서는 7화 한 회가 전부 한수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한수가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가 던져진 파도 속에서 뒤집히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선자의 삶을 맴돌았던 이유가 오로지 자신의 아들 노아 때문만이었을까. 그녀를 알아보고, 그녀의 삶을 궁금해하며, 그녀에게 꿈을 묻고 꿈꾸게 한 그 순간들이 모두 욕정 때문만이라고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사랑 없이 성공을 위해 선택한 일본 여자와의 결혼, 아내의 결벽증으로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불가능했던 한수는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드라마에서) 그는 관동 대지진속에 아버지를 잃었고, 무참히 화형 당하는 조선인들을 숨어 바라보며 무력감에 몸서리친다. 힘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늘 깨어 악착같이 살아내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그것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으며 살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운명처럼 늘 '살아있는' 선자를 알아보았을지 모른다. 선자에게서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삶을 함께 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녀의 곁을 평생 맴돌았으며, 그녀는 그가 살아가는 데 있어 큰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아픈 캐릭터로, 긴 여운이 남는 한수.



선자의 시숙인 요셉과 그의 아내 경희.​

평생 가족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며 살아온 요셉은 폭격으로 반신불수의 몸으로 목숨을 버티며 살아가고, 그의 아내 경희는 고집스러운 남편의 말에 순종하며 평생 남편을 존경하며 살아낸다. 이들에게 아이를 허락지 않았으며, 더 이상 고상하고 우아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삶을 주셨어도 경희는 신을 섬기며 최선을 다해 살아낸다. 그런 경희 곁을 맴돌던 한수의 하수인 창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내를 부탁한다는 요셉의 부탁에도 사랑하는 경희를 뒤로하고 고국의 북쪽으로 떠난다.



떠나는 창호에게 요셉은 지금 이 조국이 처한 상황은 누구 하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공산주의니 뭐니 집어치우고 본인의 삶을 살아가라 한다. 하지만 창호는 나라를 바로 세울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필요하다며 결국 조국으로 돌아간다.


경희의 삶도, 창호의 삶도, 또 요셉의 삶도 모두 그 시절을 살아낸 애처로운 인생들이다.


세계 전쟁이 벌어지고, 내 조국은 식민지가 되었고, 식민지의 백성으로 개개인은 인내하며 살아남아야 했고,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으나 또다시 두 이념의 다툼 속에 안락한 삶은 찾을 수는 없었다. 이런 커다란 파도에 올라타 있다면 내 삶이라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까. 인생의 무게가 버겁다고 한들 누구를 원망할 수 있으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각자의 소신과 신념대로 견뎌내고 살아내는 거지.


운이 좋아 그 큰 파도 속에서도 뒤집히지 않을 곳에 자리 잡고 숨죽여 조심히 넘어갈 수도, 억세게 운이 나빠 그 파도에 휩쓸려 인생의 바닥을 치게 될 수도 있다. 그저 내가 그 운 좋은 자리이기를 희망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내는 게 인생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오디오북을 통해 먼저 듣고, 책으로 다시 읽었다.

그리고 애플티브이의 드라마도 보았다. 책과 영상 중에서 책을 먼저 보길 추천한다. 파친코 드라마에 쏟은 배우들과 제작진들의 열정과 성의도 대단해 보였다. 이민호는 한수를 연기하기 위해 그 시대를 공부하며 한수를 완벽히 이해해보려 부단히 애썼다고 한다. 위안부에서 고향 부산으로 돌아와 결국은 목숨을 끊었다는 덕희(드라마에서 동희)의 소식을 선자에게 전달하는 복희 할머니의 대사를 여러 번 돌려서 다시 보았다.

"내는 그렇게라도 여 돌아온 걸 좋아했는디, 동희는 그 기쁨이 오래가질 않더라구. 두고 간 모습, 또 지 돌아온 모습하고 영판 달랐으니까. 우리가 빨래하던데 있제. 거서.. 있드라. 시상 사는 것을 꿈속에서 노이는거 메이로 사는 사람도 있제, 마 그런 사람들은 모진 세월 못 버텨낸데이. "



동희의 죽음을 전하는 복희도, 듣는 선자의 표정과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얼마나 마음을 실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당연히 글의 세심함을 다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영상으로 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이들의 정성에 충분한 감동을 받았다.


선자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모세),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 그들의 둘러싼 인물들을 통해 또 그 시대를 견뎌내거나 그렇지 못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역사, 혹은 신의 의지는 공명정대한 역학을 기간으로 하되, 잔가지 잔뿌리는 역사의, 신의 의지 밖에서 우연과 변칙이 시간 공간 속을 소요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고, 다만, 필경에는 우여곡절 하여 그 기간으로 귀납될 것을 신이나 역사 그리고 예지의 사람들이 알고 있으며 믿고 있을 뿐이다.(중략) 역사는 비로소 정확한 자를 들고 인간 정신을 측정할 것이며 공명정대한 역학적 기간으로 귀납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 존엄을 찾게 될 후일 사가(史家)는 이 시대의 승리를 영광의 승리라 하지 않을 것이다. 패배를 치욕의 패배라 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 <토지>의 한 부분이다. 그 시대를 살아낸 세대는 우리를 저버린 역사, 신의 의지라도 후일을 희망하며 그렇게 견디며 살아내며 견뎌냈다.


역사는 우리는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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