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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제이 Sep 27. 2021

4장. 나는 한국 사람이다.

평생 한국에서 나고 자라고 30년을 보냈기 때문에 내 평생 한국인이라는 자각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50개 국적의 친구들과 동거 동락하는 과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라는 사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인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내 나라를 모르고 살았나에 대해서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에서 살 때보다 나의 한국인으로서의 존재감이 강해졌고, 한국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나를 통해 한국을 처음 접하는 친구들에게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모습이고 싶다는 얼토당토않은 애국심마저 생기는 것이었다.


많은 엠비에이 프로그램은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함께 모이는 특성을 살려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기회로 컬처 위크를 진행하고 있다. 에슈쎄 역시 수년에 걸쳐 라틴위크, 아프리칸 위크, 인디언 위크, 중국 위크와 같은 형식으로 각 나라 별로 혹은 유사한 문화권 별로 학생들이 직접 기획하여 컬처 위크를 진행함으로써 학생들이 다양한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나는 모든 컬처 위크의 행사에 적극적 참여했고 이제는 에콰도르의 마림 바스 댄스도 어쭙잖게나마 스텝을 밟을 수 있고, 인도의 전통 의상 샤리를 입는 것도 낯설지 않다.


사실 에쓔세는 전통적으로 한국 학생이 많지 않았다. 물론 180명의 소수 정예 수업 방식을 고수하는 학교 정책 상 2-3명 정도의 한국 학생이면 적절한 비율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내가 입학한 2012년 9월 ji 한국인이 무려 10명으로 182명의 전 급우 중 7%를 차지했다. 1월에 입학한 3명을 더하면 215명 중 13명으로 5%를 차지했다. 실제 중국 메인랜드에서 온 친구들이 오직 3명 임을 생각해볼 때 상당히 많은 수였고, 이전까지는 매년 한 두 명 정도의 한국인 학생뿐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대단한 성장이었다. 학교 랭킹이 많이 올라 랭킹에 민감한 한국인들의 지원이 늘기도 했겠고 기존 한국인 졸업생 분들이 졸업 후에 좋은 커리어를 만들어가고 있어서 학교 입장에서도 한국 학생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탓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소위 쪽수도 맞고 바쁜 와중이었지만 아직도 북한에서 왔니, 남한에서 왔니, 를 묻는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한국의 주간 행사를 개최하는 것은 할까 말까를 고민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었다. 어떤 과정을 감수하더라도 꼭 해내야 한다는 사명감과도 같았다. 그렇게 한국의 주간 행사 주최 위원회가 형성됐고, 2달의 짧은 시간 동안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 의미 있는 행사를 준비하고, 성공적으로 주최해야 했다.


물론 한국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인 만큼 서로 하고 싶은 콘텐츠도 달랐고, 진행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의견들이 충돌했다. 몇 번은 서로 얼굴을 붉히고 회의가 끝이 나기도 했지만, 한국 주간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싶은 욕심은 같았기 때문에 하나씩 하나씩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실타래가 한 가닥 한 가닥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한불 상공 회의소의 도움으로 꽤 많은 한국 기업들에게 컨택을 시도해서 행사의 취지와 더불어 회사에서 어떤 기대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하며 협조를 요청했다. 학생들에게 표를 팔아 어느 정도 금액은 마련하겠지만 그 금액으로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돈을 끌어오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더불어 한국 관광공사와 한국문화원을 통해 행사 진행에 필요한 콘텐츠와 자료들을 협조받기로 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널려있는 당연한 것들이 파리에서는 너무 희귀하여 어려움이 컸는데, 가령 궁중 한복을 구하려고 팔방으로 뛰어다녔지만 결국 높은 비용을 감수하고서라도 구해보려는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짧은 일주일 겨울 방학 동안 한국에 다녀오는 분이 집 앞 한복집에서 공수해오는 수밖에 없었다. 공문을 작성하고 사전에 약속을 잡아 파리 지사로 직접 만나 뵙고 협조를 요청하고, 실제로 이야기가 잘 풀려 현물이든 현품이든 를 조달받는 데까지는 상당히 많은 노력과 시간을 요했다. 이렇게 열세 명이 한 마음이 되어 함께 뛴 덕분에 한 달 반 정도의 시간에 약간의 후원금과, 현물이 어려운 경우 다양한 상품들을 후원받기로 했다.


콘텐츠는 너무 진지하지 않고 너무 가볍지도 않지만 한국을 알릴 수 있는 그런 문화적 코드로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몇 주에 걸쳐 다양한 아이디어를 논의하고 그러면서 점차 몇 개의 안으로 축소시켜 나갔다. 게다가 한국주간 앞 뒤로는 일본과 중국 주간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 일본, 중국과 차별화되는 우리만의 문화적 코드를 알리는 것이 주요했다. 사실 삼십 년 평생 한국에서 살아온 나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다른 한국 학생분들에게 이것은 풀어야 할 큰 물음표였다. 한중일 연속상에서 우리만이 가진 문화적 코드는 과연 어떤 걸까.


큰 주제는 한글, 한식으로 정해졌고, 그 주제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양한 포차와 폭탄주 문화도 소개하기로 했다.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사물놀이, 태권도 시범까지 어렵사리 준비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당연한 것들이 이곳 프랑스에서는 워낙 희귀한 물건들이다 보니, 어려움이 컸는데, 특히 백세주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려웠다. 한국 백세주 담당자분을 통해 프랑스에서 전담 수입하는 한국 분과 연락을 닿을 수 있었고, 정준이의 10년도 더 된 차를 덜덜덜 몰고 가서 백세주, 막걸리, 소주 스무 박스를 담아오는 길은 어찌나 뿌듯하던지 모른다. 뉴욕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레헴은 언제나 모델처럼 차려입고 모델처럼 걷는  MBA 급우였는데, 처음 마셔 본 백세주의 맛에 푹 빠져버렸고, 백세주를 한 손에 들고 마치 병맥주를 마시듯 홀짝홀짝거리는 그의 모습은 정말 코믹하면서도 왠지 광고사진 같기도 했다.


밑반찬 문화가 없는 그들 앞에 펼쳐져 있는 그 짜디짠 김치, 오징어 볶음, 콩나물 무침 등을 전식으로 생각하고, 비빔밥이 채 등장도 하기 전에 깔끔히 비워버렸다. 디저트 문화가 없었던 우리는 미처 식사 후 양갱이나 한과류 등의 달콤류를 준비하는 것을 미쳐 생각하지 못했고, 디저트가 없으면 식사가 제대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 친구들이 어정쩡하게 테이블을 서성대면서 디저트는 언제 나오냐는 질문을 할 때까지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이렇게 신기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는 계기였고, 작고 사소한 것일수록 조금 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함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당연한 것을 이제는 왜 그렇게 됐을까 고민하게 됐고, 그것이 토종 한국인에서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 나 자신을 재정립할 수 있는 하나의 좋은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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