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예그림의 단어사전

by 예그림

제가 네이버에서 쓰고 있던 블로그의 제목은 '지혜로운 할머니 되기'입니다. 이상적인 제 미래 이미지를 그린 것인데, 그때 구체적으로 떠올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나무 냄새, 책 냄새가 가득한 서재 책상에 앉아서, 안경을 쓰고 책을 읽고 있는 인자한 표정의 할머니. 열린 창문에서는 맑은 하늘이 보이고, 지혜를 구하러 사람들이 찾아오는 장면. 그게 제가 꿈꾸는 이상적인 미래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할머니'라는 단어 자체를 생각하면 조금 다른 의미가 떠오릅니다.

'할머니'라는 단어를 보면 아래의 둘 중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시나요?

1. 자신의 친할머니나 외할머니

(혹은 알고 지내는 할머니)

2. 여자 노인의 이미지


저는 '할머니'라는 단어를 보면 1번 보다 2번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냥 스테레오 타입의 여자 노인의 이미지이지요. 그런데 이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것도 참 개인적인 말입니다. 저는 '할머니'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당연히 시골집에 사는 허리 굽고 머리가 하얀 할머니를 떠올리거든요. 막상 제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모두 그렇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요..


게다가 떠올리는 이미지 상보다 더 큰 차이는 단어가 주는 어감의 느낌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할머니'라는 단어에서 긍정성을 많이 느끼시나요? 부정성을 많이 느끼시나요?


제게 '할머니'라는 단어는 강인함, 지혜, 자유를 떠올리게 하는 긍정적인 단어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할머니가 연민, 고난, 억척스러움 등을 떠올리게 하는 슬픔의 단어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정, 푸근함, 사랑 등의 따뜻한 단어이기도 하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추함, 치매, 막무가내 등의 혐오와 부정의 단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물론 '할머니'의 그런 속성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저에게는 왜 그런 단어들이 먼저 떠오르지 않았는지.


그리고 할머니에 대해 생각해 볼수록 제가 떠올리는 이미지들이 생각보다 독특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단어 사전에 대해 쓰려고 할 때 첫 번째로 이 단어를 고르게 되었지요.


제가 떠올린 '강인함. 지혜, 자유' 중에서 그나마 쉽게 와닿는 이미지는 '강인함'일까요? 그런데 제가 떠올리는 강인함은 '억척스러움'이 아니랍니다. 꺾어도 부러지거나 잘리지 않고, 어떤 시인이 말했듯이 바람이 불어도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는 '풀' 같은 강인함이랍니다. 뽑아내도 다시 자라나는 잡초 같은 강인함이기도 하지요. 세월의 온갖 풍파를 손과 얼굴에 새기고도 친절함과 정을 잃지 않는 그런 강인함. 그게 제가 느끼는 할머니의 강인함이랍니다.


'지혜'는 두 갈래의 이미지가 동시에 떠올라요. 원시 부족의 샤먼이나 약사 할머니 같은, 넓은 시야와 깊은 마음으로 방향을 일러주는 '지혜'를 생각하기도 하고요. 유명인으로 치면 배우 김혜자 님이나 윤여정 님, 밀라논나님처럼 자신만의 지혜로 삶을 만들어나가는 분들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뭐가 되었든 남들이 존경할만한, 삶에서 직접 체득한 무언가를 가지고 계시고 나누는 분들. 그것에 가장 가까운 단어가 '지혜'인 것 같아요.


할머니를 떠올릴 때 '자유'가 아마 제일 낯선 단어일 텐데요. 제가 생각하는 할머니의 자유 역시 두 갈래입니다. 책임보다 사랑을 우선시할 수 있는 자유, 여자나 여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


첫째로 책임보다 사랑을 우선시할 수 있는 자유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저희 엄마 이야기를 드려야 합니다. 저는 언니가 조카를 낳고 나서 조카를 구경간 게 아니라 저희 엄마를 구경하러 갔었답니다. 언니가 손녀를 대하는 엄마의 모습이 그렇게 신기하다고 꼭 봐야 한다고 신신당부했거든요. 저희 어릴 때는 그렇게 엄격하고 호랑이 같던 엄마가 손녀 앞에서는 얼마나 사랑이 넘치시던지. 나중에 툴툴거리며 엄마에게 말하니까 '책임질 것 없이 마음껏 사랑만 할 수 있어서'라고 답변하신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무책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녀라는 무거운 책임에서 벗어나 손녀에게는 마음껏 사랑을 퍼부어줄 수 있는 마음이지요.

또 저희 엄마는 정년퇴직하신 이후 바이올린을 3년째 배우고 계신데, 하루에 정말로 매일 1시간 이상씩 연습을 하며 바이올린을 사랑하고 계신답니다. 공연을 할 것도 아니고, 실력이 빠르게 나아지는 것도 아니지만, 정말 말 그대로 즐기고 사랑하는 것. 너무 멋지지 않나요?


'여자나 여성에서 벗어나는 자유'라는 말은 쓰면서도 좀 조심스럽고 그냥 혼자서 꿈꾸는 듯한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지만, 제 스스로 갖고 있는 가장 이상적인 이미지인데요.. '생리'라는 여성과 여자의 상징에서도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여자나 여성이 갖는 이미지나 프레임에서 초탈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의 이미지예요..

물론 누군가는 할머니도 벗어날 수 없다고, 할머니도 여성이나 여자를 꿈꾼다고 말씀하실 지도 모르고, 그런 이미지나 프레임은 스스로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하니 지금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냥 제게는 막연하게 할머니가 되면 그것을 넘어서서 그냥 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유의 이미지랍니다.


저에게 '강인함, 지혜, 자유'를 주는 희망과 꿈의 단어인 '할머니'


여러분에게는 어떤 단어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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