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이 제일 먼저다
올해 7살인 첫째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체육복을 입고 가는 날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아이가 체육복을 입고 가는 날인데도 입기 싫다며 그냥 옷을 입고 가겠다고 했다.
한두 번은 그냥 입기가 싫은가 보다 하고 다른 옷을 입혀 보냈었다. 그런데 세 번째 체육복을 거부한 날 도대체 왜 안 입으려고 하는지를 물었는데 예상외의 대답이 나왔다. 하원하고 가는 공부방에 형들이 유치원 이름을 바꿔서 이빨 유치원이라고 놀려서 입기 싫다는 것이었다.
거부했던 이유가 생각보다 너무 단순하고 어이가 없어서 잠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었다. 고작 이런 이유로 안 입으려고 했던 것이라니. 내가 7살의 마음을 너무 모르는 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얼른 옷을 입혀 준비를 끝낸 후 등원을 보내고 출근을 해야 하기에 우선은 달래서 입혀야겠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하원하고 집에 들러서 체육복이 아닌 일반 옷으로 갈아입고 공부방에 가면 된다고 설득을 하고 그 설득이 통해서 결국 체육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집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는 양치와 세수, 머리 모양까지 봐줘야 하고 그 와중에 워낙에 꾸물거리고 장난을 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알기에 집에서는 더 이상 그 얘기를 꺼내지 않고 집에서 출발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워 집중했다. 다만 준비하고 나가는 찰나의 시간 동안 잠시 아이에게 어떻게 말을 해주면 좋을까 생각을 정리했다.
유치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는 아이가 틀어달라고 하는 노래를 주로 틀어준다. 출근이 즐거워야 하듯 등원도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좋으니깐. 혹은 듣고 싶은 노래가 별로 없을 땐 엄마 듣고 싶은 걸 들으라며 양보도 해준다. 잠시 신호에 걸려있을 때 말을 꺼냈다. 형들이 이빨 유치원이라고 놀리는 게 싫었냐고. 아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최대한 무덤덤하게 나의 생각을 아이에게 전했다.
"형들이 놀려서 네가 체육복을 더 이상 입고가지 않는다면 그 형들이 원하는 데로 네가 해준 거야. 네가 거기에 반응했다는 걸 형들이 알게 되면 더 재밌어하겠지. 그러니 그냥 놀리면 그런가 보다 하고 신경 쓰지 말고, 아무런 반응을 하지 마. 그럼 재미가 없어서 놀리지 않을 거야"
최대한 아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말을 전했는데 조금은 이해를 하는 듯한 모습인 것 같아 안심은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 켠에 걱정은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날 퇴근하고 물어보니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지 않고 체육복을 입은 상태에서 공부방에 갔다고 한다. 형들이 오늘도 놀렸냐고 물어보니 놀리지 않았고 오히려 귀엽다고 했다고 한다. 이렇게 일단락이 된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앞으로 이런 비슷한 일들을 나에게 말하는 날이 얼마나 많을까. 그때마다 나는 어떻게 아이에게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 놀리고, 그에 반응하면 놀린 친구들은 반응이 재미있는 아이를 계속 놀리게 될 게 뻔하기 때문에 최대한 반응하지 말라고 알려주었는데 이게 과연 최선의 방법이었을까. 지금 성인이고 엄마인 나는 그걸 알지만 7살의 아이는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거겠지.
내면이 건강하고 튼튼한 아이로 키우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렇게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존감을 높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내가 높은 자존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를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받은 엄마의 무한한 사랑 표현이었던 것 같다. 엄청나게 부유한 가정도 아니었고 맞벌이로 일하시는 부모, 무뚝뚝하고 쌍방 소통이 아닌 원웨이 통보로만 관계가 유지되었던 아빠의 보육 아래 나는 그저 무한히도 사랑한다고 표현해 주는 엄마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이런 자존감은커녕, 이미 바닥까지 내려가 올라오지 못하고 허우적 대고 있었을 것이다.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어 내 아이들에게는 규칙적으로 혹은 아무런 이유나 뜬금없이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나의 이런 표현이 우리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이는데 조금이라도 공헌할 수 있길 바라본다. 본인이 가지지 못한 걸 가진 사람이 있다면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탐내지 않고, 묵묵히 본인의 길을 갈 수 있기를. 놀리는 친구를 나와는 다름을 받아들이고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아이가 되기를. 그렇게 될 수 있는 데에 엄마인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