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냉장고에서 3만원을 꺼냈다>

성추행 피해자의 일상

by 치치

그는 냉장고에서 3만원을 꺼냈다. 차가운 지폐를 두 손의 온기로 녹이려다, 김치국물 얼룩을 보곤 이내 내려놓는다. 해원은 요즘 보물찾기를 하고 있다. 저번주엔 10살 때 쓴 편지를 찾았고, 그 전 주에 찾은 500원으로는 마이쮸를 사먹었다.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을 느껴보라는 의사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셀프 보물찾기를 고안해 낸 것이다. 해원은 자신이 살아야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보물찾기가 끝나면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로 시작한 상담은 늘 약 처방으로 마무리된다. 팔만원, 충격 요법. 가해자에게 청구할 영수증을 살피다, 상담 시간에 하고있는 것이 충격요법이란 걸 알게되었다. ’어쩐지, 나쁘게 말하시더라' 생각하며 차에 몸을 싣는 해원. 엄마는 요즘 조심스럽다. 말하다가도, 걷다가도, 음악을 듣다가도 귀가 아프다며 손으로 틀어막는 해원 탓에 정적만 맴돈다. 괜히 미안한 해원은 오늘 상담에서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의 경계를 보호하는 능력이 없다고 혼난 이야기, 가해자에게 별로 화가 안나서 혼난 이야기, 엄마 아빠 뒷담화 하고 온 이야기. 엄마가 나름 자신의 변론을 하기 시작하자 해원을 급하게 귀를 틀어막는다. 이야기가 듣기 싫은 것도 일정 부분 있지만, 귀가 찢어질 듯이 아팠기 때문이다. 다시 고요해진 차 안에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해원은 어서 내리고만 싶었다.


‘어쩌면 나는 가해자를 미워할 힘을 죄다 엄마에게 써버리고 있을지도‘ 검은 방 안에 드러누운 해원은 또 엄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왜 엄마를 미워하는가. 해원에겐 생각할 거리가 생겼다. 답은 명쾌했다. 폭력적인 엄마였어서, 혹은 나를 억지로 가해자와 합의시켜서. 해원은 가해자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최고의 악당 자리를 엄마에게 빼앗겼으니 말이다. 귀신같은 엄마는, 해원이 자신을 생각하고 있을 때 마다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의 부재중이 쌓여만감에도, 해원은 전화를 받지 않고는 했다. 이상하게도 엄마랑 있을 때면 성추행 당하던 그 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엔 전화를 받아본다. 도저히 화가나고 슬퍼서, 울분에 차서 어쩔 줄 모르겠기 때문이다. 엄마와의 감정을 정리해야했다. 해원은 보물찾기 이야기를 꺼냈다. 10살 때 썼던 편지를 봤는데, 그 안엔 엄마와의 이야기가 가득했다고 요즘도 엄마를 많이 생각한다고 말했다. 엄마는 귀엽게 웃었다. 그러다 울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네가 끝까지 날 미워하면 어떡하냐고 말이다. 해원은 그걸 아는 사람이 왜 그랬냐며 화를 냈다. 어느정도 정리되었다 생각한 엄마에 대한 기억이 다 헤집어져 엉망이 되버린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를 합의하게끔 한 엄마가 너무 밉다고, 나쁘게 말하던 엄마의 모습이 너무 상처였다고 뱉어버니 그제야 해원은 생각 정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가해자 부모나 가해자와 싸우는 것보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싸우고, 미워하게 되는 일이 더 힘들었다. '나는 피해당사자이지만 내 가족, 애인도 피해자이지 않나?' 해원은 가족이라서 용호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최선을 이해해볼 수는 있었다. 정말 미워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이제야 명쾌해지는 기분이었다. 해원의 몸과 마음, 일상을 망가뜨리고, 주변인을 상처주고, 서로 싸우게 한 한 사람. 해원은 그 사람부터 충분히 미워해야 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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