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에도 마케터가 있어요?'
'방송국 마케터는 무슨 일을 해요?'
업계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많이들 이런 질문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송국에 프로그램을 만드는 작가, PD외에 다른 역할이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제작 빼고는 다 해요'라고 웃어넘기곤 했는데, 실제로 내가 일했던 방송국에서는 마케터와 제작진이 긴밀하게 붙어서 일하는 시스템이었다.
방송국에서 마케터의 일은 회사마다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큰 틀에서는 같다.
'프로그램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게 하는 일'
업무 범위나 역할에 대해서는 팀마다 다르지만, 내가 있었던 방송국에서는 마케터의 관여도가 꽤나 높은 편이었다. IP를 소유하고 있는 제작사이다 보니 이 프로그램 IP가 잘 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했고, 사업적으로도 수익을 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방송 프로그램의 제작비는 아무래도 프로그램이 꽤 긴 기간에 거쳐 제작되는만큼 큰 비용인데, 이를 충당할 수 있을만한 수익이 방송국 입장에서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tvN의 <지구오락실>을 예로 들어보자면 이 프로그램은 TV편성도 되고, 티빙에도 나가고, 유튜브로도 볼 수 있다. 제작진은 이미 본편 편집으로 매일 밤을 새고 바쁘기 때문에 유튜브 썸네일을 제작하거나, OTT플랫폼과 프로모션을 진행하거나 하는 제작 외에 수반되는 일들은 마케터들이 맡는다. 더현대 서울에서 캐릭터 IP인 '토롱이'로 오프라인 팝업스토어를 열기도 한다. 기획부터 장소 섭외 및 대관, 굿즈 제작, 커뮤니케이션 등 팝업에 수반되는 온오프라인 프로모션도 모두 마케터의 몫이다.
내가 맡았던 음악 예능 프로그램들의 수익화 방법은 음원이나 협찬/광고, 프로그램 판권판매, 그리고 공연이었다. 매주 프로그램에 나왔던 곡들로 음원을 제작하고, TV/디지털로 협찬상품을 제안하기도 하고, 프로그램 판권 자체를 해외에 판매하기도 한다. 조직에 따라서는 사업과 마케팅의 영역이 세부적으로 나눠지는 곳도 있겠지만, 우리는 오히려 결합된 형태였다 보니 사업적으로 프로그램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큰그림을 볼 수 있었다.
입사하고 런칭이 2주도 안남은 프로그램을 첫 프로그램으로 갑자기 맡게되었다. 내 첫 프로그램은 크로스오버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는데, 이미 시즌3까지 코어팬이 탄탄한 프로그램이었다. 근데 난 전 시즌을 본 것도 아니고, '크로스오버'라는 장르에 대해서도 무지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이 프로그램만의 특수성과 팬들이 공유하는 문화를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매일같이 커뮤니티를 모니터링하고 전 시즌 클립들을 모아봤다. 영상에 달린 댓글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살폈다. 본편이 나오기 전 제작진에서 cg나 자막이 입히기 전의 '가편본'을 공유해주는데 이 가편본과 실시간으로 보는 본편, 끝나고 나오는 클립영상들까지 거의 매회차를 3번씩은 돌려봤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목표를 말하고 다니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나 자주 말하고 다녔던 게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사람이 될게'였다. 하나의 방송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고생하는지를 그동안 너무나 많이 봐왔기에, 나도 그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었다. 근데 그 꿈을 꽤 빨리 이룬거다. 입사 2주만에 내 이름이 들어간 프로그램이 생겼다.
첫 방송은 큰 화면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에 TV를 틀고 떨리는 마음으로 대기를 했다. 금요일 밤 9시에, 프로그램의 러닝타임이 2시간 정도로 긴 편인데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엔딩크레딧이 나오는 순간까지 기다렸다. 처음 TV에서 내 이름을 봤던 순간은 전율이었고, 그동안의 시간에 대한 보상이었다.
- '왜 방송이 좋을까?' 생각했을 때 내 답은 사람들에게 우리 콘텐츠가 닿고, 각자의 의미가 생기는 순간들을 보는 게 좋아서인것 같다. 볼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 콘텐츠를 선택해서 봐주고, 삶의 일부가 되는 걸 보면 뿌듯함을 느낀다. 방송을 만들어가는 일원이 되었다는 게 새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어서 설레인다.
- 잘 찾아온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게, 방송 일을 경험하면서도 엔터나 기자 쪽은 어떻게 일하는지 옆 팀을 보며 간접경험을 할 수 있다. 하고 싶은게 많고 관심있는 분야가 많은 나에게는 배울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이 아닐까
- 담당자가 되는 게 좋다. 그만큼 책임감이라는 무게를 짊어지는 것이지만, 그래서 더 잘하고 싶어진다. 어떻게 하면 더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과정이 좋다. 열정과 애정을 내 가장 큰 무기로.
- 커뮤니케이션의 대상도 정말 많다. 그만큼 정신이 없기도 하지만, 협업하며 시너지를 내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만족스러운 부분이다. 제작진 외에도 협찬사, 회사 내 다른 팀분들까지 정말 업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분들이 많아서 미팅도 많고, 연락할 일도 정말 많다. 업무의 범위도 다양하다. 이제 한달정도 되었지만, 여전히 모르는 업무가 너무 많고, 한번에 파악이 안될 정도로 업무가 다양하다. 멀티가 가능한지가 점점 더 중요해질듯
- 마지막으로는 발로 뛰는 일이 많아서 좋다. 입사 첫주부터 답사를 갔고, 촬영장도 갔고, 미팅도 많이 했다. 사무실에만 앉아서 일을 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서 내 성향과 잘 맞다고 느껴진다
입사 한달차에 남겨두었던 기록 중 일부.
초반의 나는 모든 게 새로웠던 것 같다. 업무범위가 다양한 것도, 커뮤니케이션 대상이 많은 것도 마냥 좋았다. '엔딩크레딧에 나오는 사람'이라는 꿈을 이룬 것도, 너무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을 하나씩 해나가고 있는 것도 그렇게나 좋았다. 프로그램 편성이 매주 금요일 밤에 잡혀 있어서, 황금같은 금요일 밤은 항상 프로그램과 함께였다.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서 제작진과 같이 일할 때도 있었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가도 회사로 돌아와 파일을 넘겨야 할 때도 있었고, 집에 있어도 신경은 항상 프로그램에 향해있었다.
초반의 시간들은 그만큼 좋아했기에 몰입하며 쏟아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