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내가 만들어낸 타인과 영화 찍기를 그만둘 것

by 우주먼지
인간은 타인을 늘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원시시대부터 이어져온 생존 본능이다. 살아남으려면 늘 바깥을 경계해야만 했다.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비교한다. 타인의 판단과 평가에 나를 가둔다. p169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보면, 이미 뽀얀 아기 피부를 갖고 있는데 화장을 너무 진하게 하고 오는 학생들이 있다. 어느 날,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져 '지수(가명)는 생얼 진짜 예쁜데, 왜 이렇게 화장을 진하게 하고 와?'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자 지수는 절대 안 믿는다는 듯이 '(풉) 무슨 소리예요 샘! 화장 안 하면 밖에 못 나와요.'라고 대답했다. 시험 기간에 화장을 못하고 오는 날엔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아예 가려버렸다. 그래도 문득문득 보이는 지수의 생얼은 정말 연예인만큼이나 깨끗하고 아기 같고 너무 예뻤다. 타인의 시선이 가장 신경 쓸 나이인 청소년기에 친구들을 의식하여 화장하는 건 그 시기의 특성이니 백번 이해한다. 그런데 꼭 이런 모습은 아이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한 나 역시도 내 생얼을 가리기 바빴으니까.


한동안 턱에 뾰루지가 멈추지 않는다. 입 주변에 뾰루지나 여드름은 여자의 생리학적 요인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배란기라서 배란통 때문에 배가 아프면서 뾰루지가 나면, 또 생리 때는 생리통 때문에 배가 아프면서 뾰루지가 난다. 어쩔 수 없는 호르몬의 노예이긴 하지만, 그럴 때면 또 화가 난다! 내 얼굴에, 여자를 이렇게 태어나게 만든 누군가에게! 후 지겨워. 며칠 전 그런 얼굴을 들고 요가를 가던 길에, 차에 비춘 내 얼굴을 보게 되었다. 만날 사람이 없으니 선크림만 바르고 다니니 뾰루지가 너무 적나라하게 보였고 한숨이 나왔다. 으휴.

그러고 도착한 요가원에서, 선생님께서 내 얼굴을 보고 '쟤는 어른인데 여드름이 왜 이렇게 나 있어.'라고 할까 봐 후다닥 이름만 말하고 들어간다. 요가 수련이 끝나고 사바 사나를 할 때 선생님께서 하나씩 물수건을 갖다 준다고 하셨다. 분명 문 앞에 누워있던 내가 제일 먼저 받을 텐데, 문소리가 난 이후에도 물수건이 안 만져진다. 나는 눈을 감은채 생각했다. '왜 나한테 안 주지? 안쪽부터 주시고 계신가?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받고 싶으면 손을 들었어야 했나? 아닌데. 분명히 필요하지 않은 사람만 배 위에 손 얹으라고 했는데. 헉. 내가 동양인이고 피부에 뭐가 나서 지저분해 보여서 나를 못 본 척하고 지나갔나?' 10초 도 안 되는 사이에 온갖 상상을 하다가 실눈을 떠보니, 오른쪽 손에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찬 물수건을 두고 가셨다. 바로 손에 갖다 놓으면 차가워 놀랄까 봐 배려해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물수건을 놓고 가신 거다. 그런데 그 짧은 찰나에 내가 만들어놓은 영화 속의 (내가 동양인이고, 깨끗하지 않은 얼굴을 가지고 영어도 어눌하게 하는 나를 피하고 싶을 것이라는) 요가 선생님을 만들어놓고 두 눈으로 확인이 무서워 눈을 더 세게 감고 누워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타인과 연극을 한다.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할 거야.'라는 상상 속에는 자신감 부족과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은 무의식이 깔려있다. 처음부터 그 사람이 정말 나를 싫어하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상관이 없다. 상대의 말과 행동, 몸짓, 태도 등 모든 것에 나의 주관적인 상상이 덧입혀져 '저 사람은 나에게 친절하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p171


배우자의 부모님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거형은 아니고 현재 진행형.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일 뿐) 왜냐하면, 나는 미국 와서 일을 하지 않고, 배우자를 따라왔기 때문에 배우자가 버는 돈만으로도 살아가야 하니까. 그리고 배우자는 박사과정을 밟는 데에 비해 나는 석사까지만 했으니까. 나이도 적지 않은 나이고. 그런 눈치가 보여 박사과정에 지원을 했지만, 배우자의 대학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공대인 곳에 비해 교육 관련 학교가 있는 옆 학교는 또 그렇게 유명한 학교가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내가 배우자보다 많이 뒤처진다고 생각했다. 만날 때마다 배우자의 건강과 공부 걱정, 연구 관련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자꾸 움츠려 들었다. 나는 영어도 그렇게 잘하지 못하고, 박사에 합격할만한 스펙도 없는데. 무엇보다 나는 좀 쉬고 싶은데.

우리의 결혼식 동영상을 보고 웃으시던 우리 부모님과 달리, 눈물을 흘리셨다는 카톡을 받았다. 나는 그것도 부정적 증거로 쌓아두었다.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 내가 그렇게 별론가. 나한테 보내신 게 진짜 마음에 안 드시나 보다. 우셨다는 이야기를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나에게 보내다니. 정말 당황스럽네.'

나는 나를 싫어한다는 증거를 모으듯 카톡 하나, 사진 하나, 대화로 나눈 이야기 하나하나 다 곱씹으면서 확신하고 있었다. 나를 싫어할 것이라고.



'만들어진 타인'에 갇히게 되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 언제나 옳다는 믿음이다. 내가 어떻게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 내리든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만난 누군가에 대해 우리가 '저 사람은 불친절해'라고 생각했다면 정말 그는 불친절한 사람일까? 그가 나를 향해 웃지 않았다는 것을 불친절한 증거로 삼을 수 있을까? 그가 나를 향해 웃지 않았다는 것을 불친절한 증거로 삼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가 불친절한 사람으로 낙인 된 것은 단지 내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불친절한 사람이라는 증거는 더욱 늘어나기 마련이다. p173

맞다. 나는 확신했다. 내 생각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좋게 생각하려고 하면, 너무 세상을 좋게 보지 말라고, 괜히 좋게 생각하다고 나중에 실망하지 말고, 거리를 두자고 생각했다. 사실 아직도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상관이 없어졌다. 마음이 가벼워져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나한테 중요한 사람들 생각만 하고 싶은 마음.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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