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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Feb 13. 2020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공포, 불안, 트라우마 극복 방법

트라우마는 어떻게 극복 가능할까?


트라우마 : 과거 경험했던 위기, 공포와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때 당시의 감정을 다시 느끼면서 심리적 불안을 겪는 증상을 말한다.


트라우마. 공포. 불안.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어둡게 침체된 덩어리는, 현실로 재창조 된다.


'생각하기도 싫어.'

라며 꽁꽁 덮어놓을 때, 자아는 답답함에 숨막혀한다는 걸 기억해야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현실로 나타나 신호를 보낼 것이다.


'날 무서워 하지마. 난 생각보다 별거 아니야.'




 트라우마가 꼭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상황만큼 큰 사건으로만 자리잡을까?

 태아를 임신한 엄마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거나, 낙태를 생각했다면, 아이는 자기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고 생각해, 불안한 정서로 살아갈 수 있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은 무의식 속에 자리잡아, 사랑받지 못하면 불안한 어른으로 자리잡는다. 

 궁금해서 한 질문에 그건 질문도 아니라며 학교 친구들 앞에서 꾸중을 들었을때, 무의식은 질문이 공포인 어른을 만든다.

 어쩌면 하루만 두고 봐도 우리가 트라우마를 얼마나 갖고있는지 세보면, 한두가지가 아닐 것이다.


 이런 트라우마는 꼭 기억하는 사건으로만 형성될까?

 수십세기를 거쳐 진화된 인간은 원시시대부터의 모든 기억으로 탄생한다. 가령, 버섯을 보고 두려움이 든다면, 꼭 매체에서 떠드는 버섯의 독성을 듣고 두려워지는게 아닐 수 있다. 그런 얘길 듣지 않았어도, 두려움이 드는 본능적으로 알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먼 조상이 물려준 트라우마다. 

 야생동물을 보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이 드는건, 그만큼 많이 포악한 동물에 죽어봤고, 줌임 당하는걸 지켜봤기 때문이다. 


 트라우마에 따라 붙어야 하는 개념이 '집착'이다.

 과한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무의식에는 과한 '반대의' 집착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무의식은 자연스레 현실로 창조된다.


의식 : 난 꼭 돈을 많이 벌어야만 해! 
무의식 : 돈에 허덕이며 살게 되는건 아닐까? -> 현실로 나타남
의식 : 아빠와 완전 다른 사람이랑 결혼할꺼야!
무의식 : 아빠랑 똑같은 남자를 만나면 어떡하지? -> 현실로 나타남


 누가 날 싫어한다고 느껴질때 자연스레 불안한 감정이 든다.


왜 불안을 느끼는가? 미움받을까봐.

왜 미움받는게 싫은가? 난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니깐.

사랑받지 않으면 어떤가? 외롭다.

외로우면 좀 어떤가? 외로우면 죽기라도 하나? 


 모든 불안이나 공포는 죽음으로 귀결된다. 죽음. 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사후세계의 알 수 없는 불확실성에 그토록 두려운 것이다. 죽음을 극복하면 두려울게 없다는 말이 있다. 알지도 못하는 미래에 '걱정'이라는 감정을 선택한 것도 역시 나였다. 뭐하러 그렇게까지 불안을 선택한단 말인가? 허무하게 해결됐다.




 내가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되면, 무의식에는 딱 정 반대의 생각이 자리잡는다. 사랑받아야 한다는 관념은 내 머리 속에서 만들어낸 규정일 뿐이다. 난 사랑받을 수도, 사랑받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랑받아야한다고 과하게 집착하면 사랑받지 않는 현실이 '나 좀 바라봐줘' 하며 나타난다.


 이럴때는, 그 상황에 깊게 놓여져 보는 것이다.미움받는게 두렵다면, 맘껏 미움받을 행동을 해보라. 


아빠같은 남자를 만나기 싫다면, 아빠랑 똑 닮은 남자와 결혼하는 상상을 해보라.
가난이 무섭다면, 찢어지게 가난한 나를 상상해보라. 
여기서 주의할 점은 상상하면서 '싫다'고 거부만 하지말고, 그냥 가만히 들여다 보는거다. 어떤 감정도 배제하고.


  죽는 상황을 계속 머리속으로 떠올려보라. 정말 죽음이 친숙해서 어째도 좋다 싶을 정도로. 난 10년 후에는 뭘 하고 있을까? 처럼 난 어떻게 죽을까?를 온갖 방법으로 떠올려보자. 자다 죽을 수도 있고, 익사할 수도 있고, 누구한테 살해당할 수도 있고,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두려워도 생각하기 싫어도 계속 떠올려보자. 슬프고 우울해질 것이다. 법률스님은 이걸 마음의 습관이라고 했다. 마음은 아직 불안을 선택하는 습관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계속 하다보면 마음도 습관이 든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이란 책도 있다. 웃으며 죽음을 얘기할때까지 도전해보자!


 이처럼 어떤 것에 두려움이 느껴진다면, 그 반대 상황을 적극적으로, 아주 친숙해져서 어째도 좋다 싶을 때까지. 맘껏 상상하는 거다. 그렇게 상상하는 도전 자체가 용기다. 모든 물체는 고유 주파수를 가진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주파수를 가지는데, 용기를 내면 손쉽게 높은 주파수로 이동할 수 있다고 한다.


 하다보면 재미가 들린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에 휩쓸려 있을뿐, 자신이 그 감정을 느낀다는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의 감정을 자세하게 분석하는건 더더욱 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재밌고, 한번 시작하면 빨려들어간다. 처음 마주하고 부딪히는게 어렵지만, 자신의 어두운 면을 들여다 본다는게 얼마나 재밌는지는 느껴보길 바란다.




 이런 '내려놓음' 기법은 완벽주의자 성향을 탈피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일을 완벽하게 잘 하고 싶었지만, 딱히 일을 잘하진 않았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스스로 끌어안았다. 아예 일을 못해버리자고 결심하고, 아예 다 망쳐버린 상황을 상상해보니, 딱히 큰 일은 나지 않았다. 그냥 일에서 짤리거나, 그냥 일이 망쳐져버릴 뿐이였다. 그런다고 죽지는 않는데 뭘. 근데 또 죽으면 죽는거지. 하며 하나씩 내려놓는 날 발견할때마다, 달라진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날 옭아매는건, 나에게 상처를 주는건, 불안정한 감정을 선택하는 것. 모두 내 선택이였다. 

모두 내가 거부하면서 생기던 부정적인 감정들이였다. 저항하기를 포기하기. 그게 내려놓음 기술이다.

 난 이제 이순신 장군이 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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