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 하마터면 길거리에 나앉을 뻔했다 (2)

매도인의 태도가 바뀌었다

by Carpe diem
계약 파기 당일, 매도인의 태도가 바뀌었다.


내 사정이 딱하고 자기 마음도 편치 않아 계약 파기는 없던 일로 하되 단돈 300 아니 단독 100이라도 더 주면 안 되겠냐고 역으로 내게 사정을 한다.


단 하루 만에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결정이라니.


그럴 마음 없다고 단박에 거절했더니 매도인의 남편이 아직 아가씨가 젊어서 물정을 잘 모른다며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말라고 거꾸로 나를 타이른다. 돈으로 얽힌 관계에 나이와 성별은 왜 개입되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결정을 내리셨을 때 좋은 감정으로, 대화다운 대화가 오가기엔 이미 불가능해진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다주택 보유자인 매도인 입장에서 정해진 시일 내에 원하는 만큼의 가격에 팔긴 어렵단 판단이 섰기 때문에 꼬리를 내린 게 분명해 보였다.


쉽게 수긍하지 않는 나의 태도에 매도인은 전략을 바꾸었다. 계약 파기로 인한 배상액은 불로소득이라 세금을 내야 하는데 그 세금을 제하고 배상하겠단다. 계약 파기의 책임이 나에게 없는데 그 세금을 왜 내가 내야 하냐고 되묻자 세무사에게 물어보라며 또 이 아가씨가 답답한 소리 한다며 엄포를 놓는다.


‘혼자 사는 젊은 여자’는 세상 물정 모르고
유약해 보이나 보다.


내야 할 세금이라면 정당하게 낼 테니 일단 약속한 위약금은 모두 이행하라고 말하는 내게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시간을 끈다. 시간을 끄는 이에게 나도 그 시간 이상의 느긋함으로 침묵하며 뭉근한 태도를 보였다. 슬슬 초조해지는 매도인 옆에서 더 초조해하는 중개인이 그러지 말고 조금이라도 집값을 올려서 합의할 수 없냐며 나를 설득한다. 중개인은 이 계약이 성사되어야 이득이니 최대한 매도인의 입장에서 일단 타일러보자는 심산인지 모르나 타협할 수 없다는 내 태도는 더 강경해졌다.


“원래대로 계약을 이행하시든지 계약을 파기하시든지 둘 중 하나만 결정하세요.”


또 오랜 침묵이 흐르고, 결국 매도인은 꼬리를 내렸다.

이제껏 남편 뒤에 숨어 한숨만 푹푹 쉬던 매도인은 입안이 다 헐어 한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다며 또 한 번 통사정을 했으나 그 마음고생이야 길거리에 나앉을 뻔한 나에게 비할 거냐고 반문했다. 결국, 예정에 없던 중도금을 아이러니하게도 계약 파기하기로 한 날 지불하고 절대로 결정을 무를 수 없도록 계약서에 문구를 명시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잔금 처리하는 날 본인은 안 오고 싶다며 부축까지 받고 집으로 향하는 매도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맞물려 걸어둔 다른 집 계약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겠다는 걱정과, 원래의 예산대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와, 다 취소해 둔 인테리어 스케줄을 원상 복귀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맥이 탁 풀렸다.


결국 맞물린 다른 집 계약금의 일부는 돌려받지 못했고 예산은 약간 타이트해졌으며 심신은 좀 더 피로한 상태로 이사는 무사히(?) 마쳤다.



적잖은 시간과 수업료를 지불하였으나 늘 가족의 그늘 아래 조금은 안일했던 내 현실 감각은 조금이나마 성장했다.


이제껏 인복도, 뭔가를 결정하고 이행하는 타이밍도 내 편인 경우가 많아 이번에도 다르지 않으리라 자만했던 태도에도 적당한 브레이크가 걸렸으니, 좀 더 신중하고 꼼꼼하게 주변을 살피고 예상 가능한 상황들을 생각해 대처해야겠다.



그러나, 한 편으론 씁쓸하다.


나이 마흔이 되고 나서야 내 몸 하나 누일 공간, 온전히 독립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도 주어졌다는 설렘조차 마음껏 누릴 수 없었으며 사람보다는 문서나 돈이 기준이 되어야 명확해지는 상황에 놓인 후 얻은 깨달음이 달갑지 않았다.


물리적 나이로 난 이미 어른이지만,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놓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해타산이 우선되는 거래에서 당연한 처사 아니냐는 몰인정 앞에 조금은 바보 같을지라도 인간적 도의가 먼저인 사람이고 싶은 내 처세는 변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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