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밤엔 잘 주무셨어요? 저 왔어요~ 식사는 잘 하셨죠?”
병실에 들어서며 커튼을 젖히고 인사를 했다. 침대 옆에 적혀있는 섭취기록을 보니 식사도 나쁘지 않게 하신 듯 했다. 짧은 인사 후 두꺼운 외투를 잘 접어 넣어두고 할아버지 침대 옆 보호자 자리에 앉았다. 이따가 밤까지 ‘너’가 있을 거냐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핸드폰에 저장해 둔 시간표를 켰다.
“이따가 저녁 8시 반쯤 이모랑 교대할 거예요. 저는 밤에 집에 갔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올 거구요”
나에게 남은 시간은 약 14시간. 그날의 보호자 근무가 시작된 것이다.
미리미리 정해진 사항이 있는지 묻는 우리 할배도, 그것보다 더 미리 이미 계획을 해둔 우리 가족들도.
우리 모두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은 사전에 계획하고 미리 확실시 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그런 가족들 사이에서 자라난 덕분에, 나와 우리 가족은 모두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을 좋아해 종이와 펜, 혹은 노트북과 엑셀을 달고 산다. 아, 좋아한다 보다, 계획이나 준비가 없으면 너무 불안해져서 이렇게 살고 있다.
이런 성격이 때로는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다. 모든 일이 다 그러하듯이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가령, 회사 일이나 중요한 행사를 준비하는 등에서는 준비에 철저한 부분이 장점이 된다. 원래 하듯이 했을 뿐인데 참 꼼꼼하다는 이야기까지 듣는다.
반면에, 융통성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다. 예전에 경험한 해외여행에서도 그 여행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 새로운 것을 보고 체험하는 게 아니라 사전에 미리 지나치게 알아보고 준비한 나머지 자료에 있던 걸 그냥 당연하게 보는 여행이 되고 말았다. 감흥이 거의 없었다. 이 단점을 처음 깨닫고서는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모르겠다. 기대했던 여행의 ‘그 맛’이 사라진 밍밍한 느낌.
무엇이든지 미리 준비하고 대처하고자 하는 성격은 조금씩은 달라도 우리 가족 모두가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할배가 병원에 있으면서 할배 본인과 우리 가족들은 이 성격 덕을 보기도 했고, 이 때문에 매우 힘들기도 했다.
미리 2주치를 정해놓은 보호자 교대 순서와 시간 덕분에 보호자들끼리 인수인계도 참 빨랐고, 그 의료진분들과 이야기 할 때에도 지난 내용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가 가능했다. 허나, 병원 특성상 환자 상태에 맞춰 모든 것이 이뤄지기에 그날의 검사 일정이나, 수술 일자 혹은 검진 시간 등은 미리 확정 지어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점이 우리 가족이 힘들었던 점 중에 하나이다. 미리미리 알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별도 안내가 있을 때 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것.
그래서 비슷한 검진이나 검사가 반복될 때엔, 며칠 전엔 검사를 어떻게 했었는지에 따라 유추해 보기도 했다. 그래서 더 하루하루 벌어지는 일들을 잘 기억해 둘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불안해서도 있지만, 할아버지 본인을 포함한 다른 식구들 전부가 알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그날그날의 기록을 조금씩 해나갔다. 그럼에도 큰 일정들은 환자인 할아버지가 얼마나 어떻게 회복하냐에 따라가기에 더더욱 퇴원은 언제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계속 바라고 기다릴 뿐. 이왕 기다려야 하는 거 마음을 비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미리 확인 할 수 없고 무작정 기다리는 건 우리 가족에게, 나에게 정말 힘든 일이다.
한편으로는 유난인가 싶었다. 중환자실에 있을 때도, 일반 병동에 있을 때도, 둘러봐도 우리 가족처럼 기록을 하거나 일정을 체크하는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과하게 걱정을 하고 불안해 하는 건 아닌가, 큰 병원이니 만큼치료가 잘 이뤄질 텐데. 그럴 때면 그 생각을 멈추게 하는 소리가 다시 들린다.
“아리야, 여기 어플에 오늘 OO검사가 O시라고 되어있는데 아까는 오늘 안 한다고 하지 않았냐?”
“할아버지~ 이따가 검사실 상황이랑 할아버지 혈액검사 결과 나오면,
상황이 되면 오늘 할 수도 있고, 아니면 하루 더 기다려 볼 수도 있다고 했어요.
제가 좀 이따가 점심 때 한 번 더 물어보고 말씀드릴께요”
어휴..우리 가족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유난이면 뭐 어때. 하나라도 더 확인 하는게 마음이 편한 걸.
여행을 한번 가려고 하면 엑셀 파일을 몇 개씩 만들고, 가족 외식을 하려면 일주일 전부터 정하는 모습들은 ‘왜 사서 고생하느냐’ 싶기도 할 것이다. 허나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에겐 오히려 미리 확인하지 않는 것이 힘들다.
보호자로서 간병을 더 기똥차게 잘 하고싶어서 일부러 더 확인하고 기록을 하는게 절대 아니다. 그렇게 준비하고 확인한다고 해서 할아버지의 병세가 빨리 낫는 것도 아니다.
그런 특별한 목적을 두고 하는 행동은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혹시 몰라 온갖 관련 정보를 미리 알아놔야만 마음이 좀 놓이는 세심한 성격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냥 성격 탓이다. 그리고 나는 이 가족의 K장녀이다. 온갖 걱정과 책임감까지 더해져 잔뜩 힘을 주고 세상을 살아가는 중이다. 유난스러움을 자처하는게 편하다.
고생스러울 것이라 절대 오해하지 마시라, 조금의 빈 시간도 평온하게 보낼 수가 없어서 몸을 바삐 움직여 걱정거리를 확인하는 것일 뿐. 이거 다~ 내가 편하자고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