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린 사촌이 있었습니다. 어린 사촌은 컴퓨터를 붙들고 놓지 않고 있었죠. 아마 그때 사촌 나이가 다섯 살이었던가 여섯 살이었을 겁니다. 근데도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고 신기했더랬죠 사촌이 컴퓨터를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저 때 무얼 했나 생각해보면 생각은 나지 않지만 컴퓨터는 아니었어요. 컴퓨터라는 것은 신기한 물건이었으니깐요. 가장 처음 본 컴퓨터가 286 컴퓨터였을 겁니다. 전자제품으로 유희를 즐기는 건 게임보이로 테트리스, 서커스 그런 것들이었을 겁니다. 날 생각하고 사촌을 보니 마우스 로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퍽이나 신기했죠. 그런데 시간이 더지나 조카가 사촌의 나이 쯤되니 마우스가 아니라 스마트 폰을 쥐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게임도 하고, 유튜브도 보고, 검색도 하는 모습을 보니 무척이나 이상한 느낌이 들더군요. 공중전화에서~스마트폰으로 점프한 것처럼 본 것이 아니라 서서히 생활 속에 스며들며 발전한 거라 신기하지는 않지만 조카가 스마트폰을 하는 모습을 물끄럼이 바라보면 가끔 묘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 때는 생각도 못할 호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요. 우리의 부모님들도 우리를 볼 때 어떤 점이 그렇게 보이고 나와 같은 생각 했을까요?. 우리가 보았을 때 호사로움을 즐기는 듯 하지만 조카는 항상 결핍합니다. 자기가 주워진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을 못하니깐요. 태어나니 있던 것들이니깐 말입니다. 항상 조카는 무얼 해달라 무얼 해달라 조르고 투정 부립니다. 먹는 것조차 생각이 다른 듯합니다. 어릴 적 저를 생각하면 밥 먹고 뒤돌아서기만 해도 또 무언가 해달라고 졸랐던 것 같은데 조카들은 입에 떠 넣어줘도 싫다고 합니다. 이런 조카의 모습이 다행스럽기도, 아니꼽기도, 귀엽기도, 밉살스럽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가족들에게 어릴 적이야기를 합니다. 먹는 것으로 싸웠던 이야기를 말이죠. 저는 웃으면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가족들의 표정을 보면 그리 좋은 표정이 아닌 걸 보아 그다음부터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조카는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며 밥투정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는지 가족 중에 한숨처럼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우리 때는 상상도 못 할 일인데”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죠. 그런데 조카는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면 이렇게 말을 받아치더군요. “상상을 해 왜 상상을 못 해?” 조카의 말을 듣고 뒤통수를 맞은 듯했습니다. 말 받아치는 솜씨가 ‘아트’라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무슨 광고 멘트 같기도 어떤 철학책에 나오는 한 구절 같기도 했습니다. 전혀 뭐랄까... ‘이치’에 맞지 않은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상상을 왜 안 한, 상상을 왜 못한 우리가 잘못됐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으니깐요. 가족들 모두들 조카의 그 한마디를 듣고 자질러 졌습니다. 한숨처럼 우리 때는 상상 못 할 일인데라고 말한 장본인도 사과하기 이르르 렀습니다. 순순해서 나오는 대답일까요?. 어느새 무언가에 잘못되어 상상도 못 하게 돼버린 어른의 잘못일까요?. 나도 너도 전부 저나이때를 거쳐간 것 같은데 왜 저때의 감정 생각을 지금은 모르게 되어 버린 걸까요? 상상도 못 할 만큼요. 요즘 들어 흔히들 가치, 가치 그럽니다. 조카가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한 번은 설날 때였어요. 설날 때 할머니, 할아버지 한태 절하기 바쁩니다. 엄마, 아빠는 어디서 구했는지 빳빳한 새 돈을 조카들 손에 쥐어줍니다. 큰 조카에게는 오만 원짜리 한 장 또 다른 작은조카에게는 만 원짜리 다섯 장을 쥐어줍니다. 그런데 작은 조카가 만 원짜리 두장을 큰 조카에게 주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조카에게 물었습니다. “왜 돈을 주려고 해?” 큰 조카에게도 말했어요. “네가 달라고 했어?” 큰 조카는 고개를 절래 절재 저었어요. 작은조카가 말했어요. “그게 아니라 나는 다섯 장인데, 한 장이잖아” 작은 조카는 돈에 금액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더군요. 어른한테 절을 하니 무언가를 주긴 주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기 아는데, 단지 조카는 금액이 아니라 장수로 많은지 적은 지를 기준을 둔듯했습니다. 가끔 이런 조카 들이여서 좋을 때가 있습니다.
조카집에 놀러 갈때면 조카들은 나의 손을 붙잡고 편의점으로 끌고 갈 때가 있습니다. 편의점에서 평소 먹고 싶은 거나 조그마한 장난감이 붙어 있는 걸 사달라고 합니다. 평소 엄마, 아빠에게 졸라도 사지 못한 것을요. 뭘 고르는 조카들의 모습이 귀여웠습니다. 평소에 같지 못한 걸 집으며 저에게 말합니다. “이 거사두되 이것도 사두되” 저는 귀찮은 듯 말합니다 “사도되” 조카는 많이 사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인지 항상 개수를 정해놓고 삽니다. 3개라던지 2개라던지 그렇게 자신이 정해둔 개수를 초과해놓고도 진짜 진짜 같고 싶은 게 있으면 미안한 얼굴로 말합니다. “이것도 사도되”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 그렇게 좋아라 합니다. 고른 물건은 계산할 때면 조카는 저에게 말합니다. “부자야?” 저는 너털웃음을 내뱉습니다. 조카의 한마디 때문에 몇 만 원 쓰고 만수르 저리 가라 하는 부자가 돼버린 겁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빛도 갚는 다라는 말이 영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닌듯합니다. 몇만원에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될까요?. 조카들을 보면 속으로 말합니다. 조카야 제발이지 천천히 자라다오. 제발 제발 천천히 자라다오. 너무 빨리 크지 말아 다오. 친구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결혼한 친구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아이를 낳기가 겁난다구요. 저는 묻습니다 “왜”라고 결혼한 친구들끼리는 무언가 알지만 표현하기가 말로써 무언가를 만들어 내뱉는 것이 어려운 듯했습니다. 그래서 에둘러 너도 결혼에 그럼 알아라고 말합니다. 조카들이 빨리 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때면 왜 인지 이런 말을 한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다른 이야기인데도요. 어쩌면 친구들의 걱정이
내가 조카들이 빨리 크지 않는 마음과 맥락이 같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큰다는 건 두려운 일입니다. 가끔은 어떤 틀 안에서 크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거든요.
네모 모양의 틀, 세모 모양의 틀, 별 모양의 틀 내가 인지 못하게 말이죠 하지만 불현듯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온전히 내가 아닌 내가 나의 진정한 모습을 모르게 될 정도로
틀 안에서 뒤틀리고 찌그러져 버렸구나 하고요. 그래서 원래대로 피려고 바르게 하려고 해도
나의 온전한 나의 모습을 모르니 그냥 이게 나인가 부다 하고 손을 놓아버린 것 같은
내가 생각지도 못하게 말이죠. 그래서 조카가 크는 게 두렵습니다. 틀 안에서 비틀려서
오직 지금의 조카의 모습이 다른 모습으로 정형화돼버릴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하겠지요 이제 어른이 다되었다고. 커가면서 조카가 자신이 내뱉은 말 그대로 컸으면 합니다.
-상상을 해, 상상을 왜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