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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종혁 Nov 17. 2019

그리는 디자인, 그리지 않는 디자인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요즘 나는 디자인을 한다'라는 식의 말을 하곤 한다. 보통의 경우 놀라워하다 디자인을 어떻게 시작했고 현재 어떤 일을 하는지로 대화가 이어지는데 그때마다 심심치 않게 듣는 말이 바로 "나는 그림에 소질이 없는데"다. 나 역시도 그림을 못 그려 슬픈 사람. '나도 그림은 못그려'라고 대답하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잘 그릴 거 아냐' 식의 답을 듣는다. 나는 정말로 그림을 못 그려 슬픈 사람. 그리고 디자인은 의외로 그림 실력과는 큰 관련이 없다. 


 물론 미술의 범주에서 바라보는 디자인의 영역이 결코 작지 않기에 그림을 잘 그린다면 디자인 업계에 종사할 가능성이 훨씬 커질 수 있다. 나 역시도 중학생 시절 미술실에서 그린 그림으로 칭찬 한 번 받은 기억이 있었다면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그 시절 장래희망의 후보군에라도 올려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실제로 그림을 좀 그린다면 디자인에 접근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현저히 늘어난다. 


 하지만 '디자인'이란 단어가 가진 범주가 무척이나 넓다는 사실에 집중해보자.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파리 브라우저의 '브런치 스마트 에디터' 역시 디자인되어 있지만 그림은 아니다. 노트북 옆에 놓여 있는 반쯤 마신 커피잔의 프랜차이즈 로고도 성실히 디자인되어 있지만, 역시 그림은 아니다. 이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대부분의 것이 디자인물이지만 '그림'이라 부를만한 것의 개체 수는 현저히 적다. 브런치의 스마트 에디터는 웹디자인, 카페의 컵과 그 위의 로고는 로고 디자인과 패키지 디자인 등 디자인이란 이름 아래 저마다 세분화된 개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디자인은 그림을 그리지 못해도 충분히 시작할 수 있다.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인디자인 역시 그림 하나 그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아 물론, 일러스트 작가나 캘리그라퍼와 같은 직업을 희망한다면 좀 그려야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갈래로 나눠진 디자인의 가지들 중에서 나는 그리고 당신은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지 않는 디자이너'가 된다면 어떤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아마도 그림을 좀 그리실 줄 아는 분들이시라면 어느 정도 자신의 경로를 탐색해봤을 가능성이 높다. 시작점 위에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만의 멋진 노하우를 지닌 분들임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디자인에 단 한 번도 손을 대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고민할 법한 일이었다. 적어도 내가 이 넓고 광활한 세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를 알아야 뭐라도 움직여볼 수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막상 '뭐를 할 수 있나'를 고민하기에는 어느 하나 할 수 있는 게 없어보인다. 내가 이와 같은 고민을 했던 시기는 막 포토샵을 익혀 재미를 붙이던 시기였다. 이제 스스로 툴을 쓸 수 있는데 이미 만들어볼만한 예제는 거의 동이났다. '포토샵을 끝냈으니 내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고?'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지금도 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 



 하지만 당장 무에서 유를 만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지 않는 디자인을 선택했으니까. 지금 필요한 건 재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배운 툴들을 단련할 수 있는 '개인 작업'이다. 시리즈로 이어나갈 수 있는 프로젝트 형태면 더욱 좋다. 나는 평소에 좋아하던 포스터 디자인을 주로 했다.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작품에 걸맞는 컨셉을 구상해 잡을 수 있고 사진 보정과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텍스트 배치를 통한 레이아웃의 밸런스를 배울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네이버 영화에 접속해보자. 그리고 평소에 보고 싶었던 혹은 흥미로워 보이는 영화를 하나 고른다. '포토보기'에 들어가 스틸컷을 하나 다운로드 받는다. 상대적으로 감각적인 컷이 많은 예술 영화일수록 더욱 좋다. 자 이제 누군가가 촬영해놓은 사진을 포토샵에 불러온 뒤 느낌이 오는대로 '색조/채도/명도'를 조정해보고 사진을 설명할 텍스트를 적당히 올린다. 그러면 놀랍게도 꽤나 그럴싸한 영화 포스터가 완성이 된다. 다음은 개인적으로 작업했던 영화 '우상'의 포스터다. 대단해보이지 않는다면 그게 정상이다. 이 때만 해도 타이포는 오로지 폰트로만 만들 수 있었으니. 물론 메인 타이틀에 구름이 일렁이는 효과를 주기는 했지만 사실 별 거 없다. 역시 나는 여전히 모자라다.


 포스터를 한 몇 십개나 만들었다면 이제 조금 질릴 수도 있다. 드로잉이 없는 디자인에는 포스터만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핀터레스트에 접속해보면 이 또한 빙산의 일각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디자인들이 눈에 들어온다면 이제는 미래를 조금이나마 그려볼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미래에 생길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수식할 단어를 선정하는 일 말이다. 예를 들면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 디자이너, 편집 디자이너 등 당신이 얻고 싶은 타이틀을 준비할 수 있는 너무도 행복한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P.S 마지막으로 드로잉이 가미되면 훨씬 더 멋진 결과물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나 역시도 언젠가는 멋진 그림을 그려 작업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기회는 만드는 자의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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