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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제시 Oct 15. 2022

척 척 척 하지 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지 못하는 것. 

듣고 싶은 말을 듣지 못하는 것이 정말 이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 


안일한 생각으로 떠나온 내가 너무 바보같아 보였고 

영어를 못하는 내가 너무 싫고 

잘해내지 못하는 내가 싫어지고 

속상해서 눈물 나는 것도 너무 싫었다.





직접 만나 본 영어 환경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국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했던 것들에도 용기를 내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모국어도 아닌 그깟 영어가 뭐라고. 실수할까 봐, 걔네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들을까 봐, 혹은 내가 걔네들 말을 못 알아들을까 봐, 이런 나를 누군가 무시하지는 않을까 싶은, 사소한 걱정들에 더더욱 수그러들곤 했다. 차라리 못 알아들으면 조금 천천히,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데.. 영어 못 하는 게 들키면 결국 해고라는 끝을 볼 것만 같은 불안감에 나름대로 묘안으로 생각해낸 것이 '알아듣는 척' 시전이었다. 


누군가 블라블라 말을 오래 하는 것 같으면, 잠시 영혼을 놓았다가 마지막 문장에만 집중한다. 조금 심각한 분위기다 싶으면 "Oh no.." 좋은 분위기다 싶으면 "Sounds good!"라고 하는 거다.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말에는 무조건 "Oh really?"라고 반응하거나 "I see."라고 급하게 대화를 마무리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면 좋겠지만, 너무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런 나약함을 숨기고만 싶었나 보다. 돌이켜 보면, 참 쓸데없는 객기를 부렸다. 






보이지 않는 벽에,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영어라는 서러움까지.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당연하게도 이 또한 익숙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한 번 해내고야 말겠다라는 독기까지 가세되어 이름하야 생존 영어! 돈버는 영어! 극복기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당장 바꿀 수 없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받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일할 때 손님이 하는 말을, 그리고 그 말을 받아치는 동료들의 말들을 녹음하기도 하고, 괜찮은 멘트들은 따로 노트에 적어 놓고는 다음에 똑같이 써먹었다. 조금 서툴러도 밝게 손님들을 맞이했고, 청소 등의 남들이 꺼려하는 일도 먼저 나서서 도맡아 하겠다고 등 적극적으로 임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서도 일하면서 써먹을 수 있는 표현들은 뭐가 있을까 생각도 해보고, 가끔은 수다거리를 준비해서 외워보기도 했다. 학창 시절을 이렇게 공부했으면 s대학도 갔을 텐데, 라는 웃픈 상상도 하며 말이다. 






짧지만 느낀 캐나다는 참 자유롭게 평화롭다.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지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지 못했던 평온함을 느끼기도, 그리고 나 자신을 온전히 느끼기도 하였다. 주변 풍경, 자연뿐만이 아니라 작은 문화까지도 새롭고 고요하며, 개개인을 존중함에 소중했다. 



이 곳에서의 하루, 만남의 시작은 모두 '하우 알유?'로 시작해서 '굿 땡큐'로 끝난다. 아침 산책을 하다가 만난 이웃 주민과도, 출퇴근하며 보는 동료들과도, 업무 중 만난 다수의 손님들과도, 그리고 생판 처음 보는 사람과도 10번의 9번 정도는 일단 이 인사 패턴을 거치고 나서야 본론에 들어간다. 종종 외국인 친구들이 how are you가 한국어로는 뭐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그때마다 뭐라고 답해주면 좋을지 고민했다. 문장 자체로만 보면 '어떻게 지내?' 아니면 '잘 지내?'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나 매일 보며 지내는 친구에게 아침에 만나서 '안녕, 잘 지내냐?' 이런 식의 인사를 건네지는 않으니까. 


한국인인 나의 관점은 이랬다. 내 가족이나 친한 친구도 아닌데, 왜 이런 싱그러운 질문을 해대는 거지? 무슨 내가 오늘 기분이 나쁘다고 그걸 직장 동료나 손님이나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어떻게 하소연하겠는가. 하소연으로 인해 오히려 분위기만 망칠 것 같고, 그래서 나의 대답은 항상 좋든 나쁘든 한결같았는데, 여기 친구들은 조잘조잘 자신의 기분을 오버하지 않는 선에서 잘 표현했다.


어떻게 보면 캐나다 사람들은 잡담이 참 많다. 길 가다 만난 사람이랑도 쉽게 말을 트고 날씨,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한다. 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손님이 없어 한가할 때는 동료들과 쉴 새 없이 조잘거린다. 하지만 공과 사가 확실한 한국에서는 일 외의 사소한 이야기를 하면 실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물론 이 또한 케바케겠지만)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날씨 이야기나 뉴스 이야기를 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눈만 마주쳐도 미소를 짓고 하루에도 수십 번 되풀이해서 쓰는 how are you라는 인사법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주 간단한 표현 같은데 how라는 단어가 주는 그 막연함이란.. 정말 내 안부가 궁금해서 묻는 걸까? 근데 가만 보면 딱히 정말 궁금해 보이지도 않고.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아임 파인땡큐, 앤 쥬?를 마치 한 세트처럼 내뱉으면서도 스스로는 어색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뭔가 나의 옷이 아닌 것을 입고 다른 문화를 흉내 내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는 나도 의식적으로 항상 인사하려고 노력해서인지 무례하단 소린 들어본 적이 없는데, 실제로 많은 네이티브 친구들이 how are you와 같은 인사법이나, 길 가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고, 말끝마다 thank you를 붙이는 서양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아시아인)들을 rude (무례)하다고, 낯선 사람에게 너무 차갑다, 라는 발언을 많이 했다. 


그런 평가가 살짝 억울하긴 하지만, 이런 사소한 문화 차이가 참 신기하면서도 재밌었다. 한국어로는 같은 뜻으로 해석되는 문장이라도 실제로는 다양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는 점도 흥미로운 배움이었다. 그리고 이 배움은 앞으로의 내 영어 공부에 작은 활기를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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