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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제시 Oct 27. 2022

단지 타국의 언어일 뿐



영어가 목표는 아니었다고 하나 사실 영어로 인해, 영어라서, 영어 때문에 겪게 되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에도 용기를 내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해야 하는 순간들이 아주아주 많았다. 내 말을 못 알아들을까 봐서, 혹은 그들이 하는 말을 내가 못 알아들을까 봐서, 동양인 여자애라고 무시할까 봐서, 실수할까 봐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경험들과 버무려져 별별 생각들에 나 자신을 중무장하며 방어막을 쳤다.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들이닥칠지 모르는 영어로 인한 좌절감이 항상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 듯했기 때문에 나는 애써 그런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더더욱 과묵한 사람이 되어갔고 시선을 피하고 몸을 수그리곤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지만 나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는 이런 나약함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처절한 애를 썼다. 돌이켜 보면 참, 이때의 나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많이 컸던 것 같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두려움과 불편함 속에서도 나름의 장점도 있었다. 


토론토, 대도시의 삶은 항상 사람이 북적이고 복잡하고 바빠서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드는 온갖 소음이 뒤섞여 있기 마련인데, 그 모든 것들이 서울과 다르게 내 신경을 거슬리지 않는 이유는 뭘까, 왜 정신없다는 느낌이 들지 않지,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그들이 하는 말을 100퍼센트 알아듣지 못한다는 거다. 집에서 나와 일터까지 향하는 버스나 지하철, 일상 속에서 흔히 가는 레스토랑이나 카페, 영화관 매표소의 긴 줄에서, 광장에서, 공원에서, 그리고 일하면서 만나는 동료나 손님들의 희노애락이 뒤섞인 수다거리들에서도 난 마치 내가 듣고 있는 게 말소리인지 음악 속 가사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한국어와 다른 리드미컬한 억양, 우리가 쓰지 않는 비강을 이용한 발음, 그런 것들이 만들어낸 소리는 내게 낯설지만 마치 처음 듣는 음악처럼 다가왔다.


내가 쓰는 말이나 글자를 그들이 모른다는 것도 좋았다. 한국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혹여나 내가 끄적여둔 비밀 일기장을 누가 볼세라 자물쇠를 걸어둔다던가, 서랍장 깊숙이 숨겨놓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언제 어디서든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내 속마음을 일기장에 써 내려갈 수 있다. 누가 보든 말든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뭐라고 끄적이고 혼잣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할 테니... (일터에 갈 때면 매일 가져가는 미니 수첩이 하나 있었는데, 페이지마다 진상 손님들을 향한 혹은 누군가를 향한 소심한 뒷담들이 한가득한 건 비밀이다..)


서로 통하지 않는 다른 언어를 쓰는 그들과 나 사이에는 분명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있다. 

그들의 일상을 마치 하나의 외국 영화를 보듯 나는 '객석'이라는 다른 위치에서 보고 있다. 내가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되고, 그들도 그런 나를 굳이 터치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반감이라는 감정이 생기려다가도 쉽게 풀려버리는 것 같다. '외국인'이니까 좀 더 배려받는 것도 분명 있을 꺼고, 똑같은 일상도 현지 사람들보다 조금 더 '여행자'라는 시선으로 더 색다르게 보이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이지 않을까.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시간이지만 일종의 정신적인 휴식과도 같은 이 순간들을 마음껏 만끽하고 싶었다. 다시 곧 닥칠 타지에서의 고난과 역경은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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