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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놈, 신기한 놈, 그리고 어른이

어제와 다른 오늘, 새로운 조각들

by 글린더

"민영아, 이거 봐봐. 어제는 이걸 해봤는데"


어느새 민영에게 말을 놓고 편하게 장난도 친다.

민영의 하소연에 맞장구도 치고 제법 어른스러운 고민도 나누며 조금씩 여느 연인들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도 종종 나누게 되었다. 민영의 부탁이면 부끄러움도 잊고 용기 있게 사람들 앞에 나서는 연습도 잦아졌다.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며 즐거운 추억을 쌓아간다.

적어도 그들에게 그렇게 평범한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남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들이 여전히 낯선 환경 속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찾아 기록하고 체크하며 스스로를 배워나가는 것은 어려웠다.

민영은 끊임없이 잘하고 있다 말해줬고 용기가 돼주었다.


그사이 힘이 꽤 세다는 것과 글을 잘 적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영은 이상하리만치 예전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물으면 다시 찾아보자며 이전에 했던 일에 대해서는 말을 얼버무리곤 했다.

그래도 새로운 시도를 하고 무언가를 경험한 이야기를 할 때면 여느 때와 같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들어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아 민영에게 이야기해 줄 것들을 적는 것으로 시작된 기록은 어느새 노트가 여러 권이 되어간다.

단순한 기록에서 일기 쓰듯 느낀 점과 여러 생각들, 상황들을 구체적으로 적어 내려가다 보니 기록은 점점 길어졌다.

민영은 그런 나의 기록지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늘 너무 잘 적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민영이 너무 좋다.

민영은 항상 한참을 읽고 나면 그 일에 관해 궁금해하며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의 민영은 듣기만 하고 일방적으로 혼자 말하는 편이었지만 그 시간이 좋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민영은 컴퓨터로 잠시 일을 하곤 했다.

투명한 테의 안경을 꺼내 쓰곤 컴퓨터를 타닥타닥 치는 민영을 볼 때면 묘한 감정이 들곤 한다. 아프다고 하기엔 약하지만 가슴이 쿵쿵거리고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든다. 뭔가 아득하고 멀리 있는 듯 한 마음에 가끔은 알 수 없는 불안감마저 들기도 했다.

조금씩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만나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민영은 뭔가 더 바빠졌다. 항상 웃고 있지만 어딘가 힘들어 보이기도 하고 더러는 아파 보이기도 했다.


"민영아, 괜찮아? 어디 아파?"

웃음 짓는 얼굴에 평소의 생기가 보이지 않던 날, 민영이 처음 만난 그날처럼 펑펑 울었다.

처음으로 민영은 쉬지 않고 울며 이야기했다. 그렇게 한참을 등을 토닥여주며 들어주기만 했다. 어느 순간 토닥여주는 손바닥에 닿는 민영의 등이 마르고 작고 연약하다는 것이 전해진다.


'지켜주고 싶다. 다시는 이 사람이 울지 않게..'


보호받는 사람에서 보호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민영 몰래 예전의 기록을 찾아 어른이 되어보기로 했다. 여전히 모르는 어른들과 섞여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은 어렵고 무서운 일이다. 다만 이제는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늘었고 그 사람을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또 다른 용기가 되어 가슴을 따뜻한 게 채워준다.

지금은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미미하지만 조금씩 빠르게 배워나갈 수 있다. 지난 몇 주간의 변화가 그러했고 지난 몇 년의 공백보다 더 큰 채움이 두려움도 마주하게 한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것을 알기에 선뜻 먼저 다가가는 것은 두렵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게 생겨버렸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받고 우는 것,
그들을 지킬 힘이 없는 것보다 두려운 건 없다


왠지 키가 한 뼘은 더 큰 듯한 느낌이 든다.

이제는 어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이 살짝 꿈틀거린다.

엄마의 늙고 깡마른 등과 민영의 연약하고 여린 등에 그들의 두 어깨에 더 이상의 짐을 지울 수는 없다. 민영도 여전히 피하는 우리의 옛집을 다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엄마와 함께 갔던 그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들긴 하지만 왠지 이제는 그게 무엇이든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래야만 할 것 같다.


다시 마주한 아파트 출입구 앞에서 살짝 식은땀이 흐른다.

왠지 이 문을 열고 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긴장감에 한참을 머뭇거리며 손잡이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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