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0장은 노아 홍수 후 번성한 인류에 대한 이야기야. 그런데, BC 3500년 경 수메르 문명이 생기기 전에 실제로 대홍수가 있었다는 것을 고고학으로 알게 되었고, 각 나라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일어난 대 홍수 이야기가 설화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역사적 사실임에 틀림없는 것 같아.
중국 한족의 홍수 설화에 ‘누와 이야기’가 있는데, 대홍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가 ‘누와’라고 한대. 성경의 ‘노아’와 비슷한 이름이지?
그리고, 중국의 다른 지방에서도 큰 강들이 범람하여 ‘파레’라는 사람과 그의 아내, 그리고 세 자녀가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있어. 이것 역시 노아 이야기가 비슷한 것 같아.
또 북미 인디언의 유적에서 발굴된 홍수 토판은 성경과 아주 흡사하단다.
위 토판의 첫째 그림은 일그러진 태양 아래 한 노인이 경배하는 모습이 있고, 물 때문에 태양이 일그러진 것으로 묘사했어. 둘째 그림은 큰 비가 내리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도 있어. 셋째 그림은 물이 창일하여 배가 떠있고 40 주야를 나타내는 네모진 칸이 좌, 우에 있어. 그리고 네 번째 그림은 비가 그치고 물이 빠져 태양이 동그랗게 그려져 있고 나뭇잎을 물고 있는 새 한 마리, 그리고 사람들이 나와있고, 배에서 동물들이 나오고 있으며, 마지막 그림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상징인 무지개가 그려져 있어.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정말 비슷하지?
한국에도 홍수 설화가 있어.
BC 3898년경, 거발한이 신시(神市)에 도읍을 둔 후 나라를 배달이라 정했는데 BC 3512년 배달국 5대 왕 ‘태우의’ 때 대홍수가 났다고 해. 이때 태우의의 막내아들 ‘복희와 누이’만 살아남았는데, 이 둘이 혼인하여 진에 도읍을 정하고 동이국을 건설했다는 설화이며, 또 목도령이라는 설화도 있어.
각 나라마다 홍수 설화가 있다는 것은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대 홍수를 겪었고, 그 이야기를 구전하는 과정에서 각색되어 후손들에게 전하였던 것 같아.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노아 이야기’는 셈족의 홍수 설화로 남 유다가 바벨론 포로 기간에 토라를 편찬할 때 하나님의 구속사적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란다.
아무튼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현재 방주는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국경지대에 있는 아라랏 산 위에 묻혀 있고, 항공사진으로 그 흔적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단다.
홍수 후의 수메르 문명과 바벨탑
노아의 후손은 점점 평지로 내려와 70 족속이 되었고, 각 족속들은 나라를 이루며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갔어. 역사적으로 볼 때 BC 3500년-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수메르 시대라고 볼 수 있단다.
수메르 시대는 자연을 개발하여 건축, 관개시설, 미술, 공예 등 기술적인 분야도 발전하여 도시를 이루고, 외부 지역과의 활발한 상거래로 말미암아 설형 문자도 만들어 사용하며 문화를 이루었어.
그런데 문화가 발달하여 풍요로와지면 왜 사람들은 기괴한 일들을 만들어낼까?
수메르의 작은 도시 바벨론에서 종교가 시작되었어.
자연에도 영이 있다고 생각하여 신성시하던 애니미즘 사상이 국가적 차원의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것이란다.
사람들은 이쪽에서 하나를 시작하면, 이내 저쪽에서 따라 하지. 유행처럼 말이야.
바벨론에서 시작된 고대 종교는 도시마다 수호신을 두고 신전을 건축하기 시작했고, 도시들이 경쟁하듯 더 높이 더 멋진 신전을 만들어 자기 명성을 내려고 했지. 이것이 바벨탑이란다.
바벨론 종교는 ‘니므롯(창 10;9)’으로부터 시작되었어.
니므롯이 죽자 그의 아내 ‘세미라미스’가 유복자인 ‘담무스’를 출산하였는데, 위협을 느낀 세미라미스가 니므롯은 하늘로 올라가 태양신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담무스는 태양신의 환생이라고 주장하였어. 이를 시작으로 왕은 신격화되었고, 왕이 죽으면 만신전에 등록하어 제사하는 풍습이 생겼단다.
담무스의 아내는 다산과 풍요의 여신 ‘아스 타롯’이 되었고, 세미라미스는 신을 낳은 신성한 여인으로 섬김을 받았어. 이때부터 아들을 안은 모자상이 만들어져 섬김의 대상이 되었고 오늘날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성화로 이어지고 있단다.
바벨론 종교의 축제는 적극적인 제의 행위로 성전을 섬기는 여사제와 성관계를 맺는 것으로 마쳤는데 이런 타락한 바벨론 종교는 경건한 자들을 집어삼키고 급속히 세계로 퍼져 나갔어. 인도의 신전 벽이 포르노 조각으로 뒤덮인 것도 이 때문이란다.
하나님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는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하신 말씀(창 6;5)을 기억하니? 홍수로 세상의 악을 멸하셨으나 또다시 죄가 관영하게 되었단다.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언약
우상의 본거지인 고대 바벨론이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을 장악하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북부까지 세력을 뻗쳐 제국으로 발돋움하려 할 즈음(BC 2000년 경),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어.
온 세상이 죄로 가득할 때 노아가 하나님을 바라보다 은혜를 입었듯이, 온 세상이 우상으로 말미암아 죄로 가득할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노아처럼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입은 것이란다.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셈을 통해서 이어졌고, 셈족이 세상 풍습에 젖어 하나님을 떠나게 되자 아브라함을 불러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잇게 하신 것이야.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 나라이고, 모든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 마음대로 통치하려고 한다면 황폐해질 수밖에 없겠지. 이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황폐해진 하나님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큰 민족을 이룰 것을 약속하시는 것이란다.
본문 창 12;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여기서 ‘네게 지시할 땅’의 원문은 ‘내가 너를 볼 땅’이란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무역로를 따라 가나안으로 떠났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히 11;8)’ 고 했어.
아브라함이 알지 못했다는 것은 목적지를 몰랐다는 것이라기보다, 어느 곳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볼 것(만날 것)인지를 알지 못한 채 떠났다는 것이야.
당시에 무역로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을 거쳐서 이집트로 연결되었는데, 가나안 땅 세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말씀하셨단다.
당시에 도시를 떠나 먼 길을 가는 것은 떠도는 유목민들의 강탈로 인하여 생명도 위협받는 위험한 일이었어. 더군다나 가족들을 다 데리고 길을 떠났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어. 그것도 하나님이 언제 자신을 만나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야.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라”라고 하신다면 “어디로요?”하고 목적지를 묻지 않겠니? 아마도 목적지를 모르면 떠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핑계를 댈 거야 “하나님이 내게 목적지를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이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결과를 모르지만 그렇게 될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의심하거나 염려하지 않는 것이란다.
노아는 100년 가까이 걸렸지만 방주를 끝까지 건축하여 구원을 얻었고,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하여 배신하고 사망에 이르게 되었지.
네가 초등학교 때 내가 신학교를 다니면서 새벽마다 눈물 흘리며 기도한 것은 “내가 곁에서 아이들을 지키고 있지 못하니 주께서 곁에서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소서”라는 것이었어.
정말 애틋한 마음으로 날마다 간절히 기도했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되, 우리의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은 하나님께 구하고 도와주실 것을 믿어야 한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신을 만나서 말씀하실 것을 믿고 머나먼 거리를 계속 이동한 것처럼 말이야. 우리도 하나님이 때를 따라 우리를 만날 것이며, 때를 따라 말씀하실 것을 믿고 하루를 살아내는 거야. 끝이 보이지 않아도 말이야.
아브라함을 불러 복의 근원으로 삼고 세상의 중심 가나안 땅의 세겜에 두시고 세상을 복되게 하기 위한 도구로 삼으신 것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삼아 우리를 만나는 자들로 하여금 복을 받도록 하심인 것을 잊지 말거라.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삶은 때때로 외롭고 지치기도 하지만 우리 함께 기도하며 믿음으로 이겨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