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가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
아브라함 이야기(2) 창 12;5-20, 16;1-16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족보)”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지 않고 왜 아브라함, 다윗을 앞에 두었을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형성과정을 족보로 축약한 것이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나라를 약속받았고, 다윗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완성했기 때문이야.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의 약속과 복의 근원으로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동일한 약속 안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고 있어.
1. 가나안 땅 세겜에서 아브라함에게 임하신 하나님; 창 12;5-8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약속하신 땅 ‘세겜’은 ‘목, 어깨’라는 뜻으로, 유럽 대륙, 아시아 대륙, 아프리카 대륙의 중심인 가나안 땅에서도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아브라함이 들어갔을 때 원주민들이 있었으나, 인구밀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골짜기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어. 그래서 아브라함은 벧엘과 아이 사이의 골짜기에 정착했단다.
가나안은 ‘낮추다’‘복종하다’라는 뜻인데, 낮은 곳에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영적 의미도 있어.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세 대륙의 중앙에 건설하고, 세상의 평화를 수호하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직무를 담당하도록 하실 계획이셨지.
2. 흔들린 아브라함의 신앙; 창 12;9-20
아브라함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가축을 먹이기 위해 거주지를 옮기기도 했어. 그러나, 가나안 땅 안에서의 이동이었는데, 그 땅에 큰 기근을 만나자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들어갔어. 이집트는 나일강의 수량이 많아 식량이 풍부했기 때문이야.
많은 식솔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족장의 입장에서는 현실에 대한 절절한 대처였다고 할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허리를 졸라매서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의지가 약했다고 할 수 있어.
이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임하지 않으신단다.
그러면 아내 사라를 이집트의 왕에게서 구해주셨을 때 하나님이 임하지 않았냐고 반문하겠지?
본문을 잘 살펴보자.
당시에는 나그네를 죽이고 그의 아내와 소유물을 빼앗는 일들이 잦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집트 사람들 앞에서는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자는 계획을 미리 세워두었어(본문 12;11-13).
역시 예상대로 바로가 아름다운 사라를 보고 아브라함의 누이인 줄 알고 예물을 후하게 주고 아내로 취하려고 했어(본문 12;14-16).
이 급박한 상황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임하지 않으셨어.
그 대신, 하나님이 직접 바로의 집을 치고 바로에게 아브라함의 아내인 것을 밝혀서 되돌리신 것이야(본문 12;17-19).
왜냐고?
하나님이 불러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란다.
이때 만약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라고 당당히 말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지시하시고 보호하셨을 거야.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임재하지 않고 바로를 직접 경고하신 거란다.
유대 랍비들은 “실제 사촌누이라 했을지라도 아브라함의 거짓이 옳은 것인가? 사라는 왜 진실을 말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지시를 따랐는가?”의 문제에 대해 아직도 토론하고 있대.
우리는 어떻게 이 부분을 해석해야 할까?
우리는 아브라함의 거짓은 덮어두고 바로에게서 많은 재물을 얻었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그러면 거짓으로 아내를 내어주고 얻은 재물이 정당화되지 않겠니?
이 사건으로 우리가 거짓말을 해도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단다.
아브라함은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인생을 턴하지 얼마 되지 않았고, 한 부족의 수장으로서 자기 부족을 지켜야 하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겠지.
하나님의 사람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단다.
과정이 올바를지라도 실패했다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잘못된 과정은 반드시 좋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나게 되지.
3. 아브라함의 또 한 번의 실수 ; 창 16;1-16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단을 쌓았던 곳으로 다시 돌아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창 13;1-4)은 곧 현실에 대처하고자 하던 삶을 돌이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다고 볼 수 있어.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없었던 것이야.
유대인의 전승으로는 사라가 불임으로 잉태가 불가능했대.
그래서 일찍 양자를 들여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았던 것 같아.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임하셔서 아들과 땅을 다시 약속하셨어.
창 15;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그냥 넘어가지 않고 약속의 증거를 요구하여 하나님과 언약식까지 했단다(창 15;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또 실수를 하고 말았어.
부인 사라의 요구로 하갈을 첩으로 두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지.
한국도 그랬듯이 고대사회는 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하면 첩을 두었어. 아브라함도 마다하지 않고 세속적인 방법을 취한 것이지.
사라는 불임자이니 하갈에게서 낳는 것이 당연해 보일 수도 있어.
그러나 이스라엘에서의 ‘네 몸’이라는 말은 부부를 일컫는 말이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낳을 아들을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아브라함은 또 현실과 타협하여 세속적인 방법을 취한 것이지.
하나님은 하갈을 첩으로 두자 13년간 아브라함에게 임재하지 않으셨고, 집안은 갈등으로 가득해졌어.
4. 아브라함의 흔들린 신앙의 결과
첫째/ 하갈이 교만해져서 사라를 괴롭혔어. 이 일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항의하자 아브라함은 하갈의 학대를 허락하지.
둘째/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사라가 낳은 이삭을 괴롭혔어. 이 일로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쫓겨났어.
셋째/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갈등을 겪고 있어.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가지 않았으면 하갈을 데리고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후세인도 없었을 것이며 오늘날의 중동 갈등은 없었겠지?
믿음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란다.
믿음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가는 과정이란다.
우리의 믿음 없는 행위가 우리와 우리의 후손에게 그대로 영향이 미친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배웠어.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풍조와 문화 앞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그러나 범사를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경에서 답을 찾아가면 반드시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를 지켜내실 거야.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가능한 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해가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우리를 가꾸어 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