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다 멈춘 자리에서, 나는 달라지고 있었다
주말 오후, 혼자 집 앞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유리 너머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삶은 꽤 편안하고 자유롭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완벽한 고요가 평온하기보다 어딘가 무료하게 느껴졌다. 재미가 없었다.
그동안 참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런데 문득, 멈춰 선 채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그렇게 달렸던 걸까? 방향도 목적도 모른 채 그저 달리는 행위 자체에만 매달려왔던 건 아니었을까?
강사로 살았던 지난날의 나는 ‘그냥’ 달렸다. 돈을 벌어야 했고, 무언가를 성취해야 했기에, ‘왜’라는 질문을 던질 사치조차 없었다. 강사의 삶은 늘 불규칙한 리듬 위에서 위태로웠다. 주말도 반납해야 했고, 저녁 수업이 잡히면 하루의 균형은 쉽게 깨졌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떠돌이 생활 속에서 ‘안정감’이라는 단어가 뿌리내릴 틈은 없었다.
그러다 서른일곱, 직업상담사가 되었다. 비록 계약직이었지만 저녁이 있는 삶과 온전한 주말이 보장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삶이 단조로워지자, 그동안 소음 속에 파묻혀 있던 내면의 질문들이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무 여유 없이 달리기만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서른일곱이었다. 회사에 다니던 친구들은 중간관리자가 되어 자리를 잡았고, 누군가는 아내로, 또 누군가는 엄마로 각자의 계절을 살아가고 있었다. 예전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며 알 수 없는 방황이 시작되었다. 혼자여도 괜찮다고 믿어왔는데, 불쑥 외로움이 고개를 들었다. ‘왜 나는 아직 혼자일까? 연애를 안 한 것도 아닌데, 왜 결혼이라는 종착지에는 닿지 못했을까?’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달리는 발을 멈춰 세웠다.
그 무렵, 친구가 건넨 책 한 권이 파문을 일으켰다. 『스님의 주례사』였다. 별 기대 없이 펼쳐 든 책 속의 문장들이 건조한 마음에 툭툭 꽂혔다. 찡했고,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것이 불교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스님의 즉문즉설을 찾아 듣기 시작했고, 그 담담한 지혜에 기대어 마음을 다독였다. 마치 내가 오랫동안 품어온 질문에 누군가 조용히 답을 건네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참여하게 된 4박 5일의 ‘깨달음의 장’. 그곳에서 나는 ‘나’라는 견고한 상(相)을 내려놓는, 낯설고도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핸드폰도 시계도 모두 반납한 채, 오로지 묵언수행으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보낸 시간.
그 시간은 오히려 나를 가장 또렷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함께한 스무 명의 수행자들을 바라보며, 마치 나를 비추는 거울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 안에서 ‘나’라고 부를 만한 실체가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비겁다자(比劫多者)로서 평생 단단하게 쌓아 올렸던 자아가,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과정은 치열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눈물도 많았다. 그러다 마지막 날 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 별이 유난히 선명했다. 세상은 처음 보는 얼굴처럼 낯설고도 아름다워 보였다. 이토록 마음이 가벼운 경험은 평생 처음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그동안 나만의 세계를 성벽처럼 높이 쌓고, 스스로를 그 안에 가두고 살았음을. 자기 상을 깨뜨리는 경험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해방이었고, 뒤이어 찾아온 것은 깊고 조용한 행복이었다. 문경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그 이후 108배와 명상을 하고 불교대학에 다니며 조금씩 나를 바꾸어 나갔다. 이 경험은 훗날 난임이라는 5년의 긴 터널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단단한 내적 근력이 되었다. 직업상담사로서 사람을 이해하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요가로 몸과 마음의 균형을 찾아가던 그 시절. 겉보기에 나는 늦은 방황을 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실은 아주 깊은 곳에서 삶의 방향키를 돌리고 있었다.
마흔이 넘어 사주를 공부하며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 시기가 내 인생에서 ‘정신의 영역으로 거대한 물이 들어오던 때’였음을. 말라 있던 사막에 갑자기 물이 스며들면, 꽃이 피기 전에 땅은 먼저 질척해진다. 서 있던 자리가 불안해지고, 딛고 있는 발밑이 흐려진다. 서른일곱에서 마흔하나까지의 내가 딱 그랬다. 삶의 방향을 잃었고, 확신을 내려놓았고, 나를 지켜주던 뻣뻣한 단단함을 하나씩 버려야 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질척이는 시간이 수행이었는지, 아니면 다가올 새로운 계절을 위한 준비였는지. 다만 분명한 건, 그 5년을 통과하며 나는 이전의 나로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길 위에서 펼친 운명의 지도]
정신의 물길 (임자대운): 37세, 내 사주에 ‘물(水)’이 들어왔다. 그것은 돈이나 직업이기 이전에, 종교와 철학, 그리고 정신의 영역이었다. 운명은 나를 멈춰 세워 내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아상(我相)의 해체: 비겁이 강해 굳어있던 흙(나)이 물을 만나 부드러워지는 과정이었다. 방황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흙이 물을 머금고 옥토(沃土)가 되기 위한 필연적인 질척임이었다.
38세 편관운(을미년)의 경고: 직장 내 스트레스로 인한 병. 조직 생활 속에서 너무 애쓰며 버티던 긴장은 결국 ‘대상포진’이라는 신호로 돌아왔다. 삶은 그렇게 내 몸을 쳐서라도 말해주고 싶었나 보다. “이제는 밖으로 달리지 말고, 안으로 깊어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