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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Nov 01. 2019

자기만의 균형

길 건너다 든 생각

 얼마 전 길을 건너다 든 생각.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에 횡단보도가 하나 있다. 왕복 2차로인 작은 도로라 건너는 거리가 길진 않지만 차량통행은 많은 편이어서 신호등이 있다. 보행자가 버튼을 눌러야 신호가 바뀌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 이 버튼을 누르는 사람이 별로 없다. 대략 열명 중 여덟 명은 차가 안오길 기다렸다가 빨간불에 길을 건넌다. 남아공이야 원래 8차로 고속도로에서도 무단횡단을 쉽게 하는 곳이긴 하지만 신호등이 있고 버튼만 누르면 바로 초록불로 바뀌는 횡단보도에서도 굳이 위험하게 길을 건너는 사람들은 살짝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 길을 건널 때 꼭 버튼을 누른다. 원래도 융통성이 별로 없어서 아무리 좁은 길이어도 빨간불엔 길을 잘 안 건넜다. 새벽에 지나다니는 차가 없어도 신호는 반드시 지키는 그런 뻣뻣한 사람 중 하나다.


 그런데 문제는 나 하나 지나간다고 신호가 바뀌면 도로 양쪽에서 차가 한참 서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10초면 길을 건너지만 초록불은 1분 정도 켜져 있는 것 같다. 건너는 사람이 별로 없고 차가 많을 때는 버튼을 누르면서도 눈치가 좀 보인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나도 남아공 사람처럼 버튼을 안 누르고 그냥 살짝 도로 쪽으로 나와 서있어 봤다. 차가 안 오면 잽싸게 건너려고 눈치를 보고 있는데, 어떤 차가 여유 있게 멈춰 서면서 건너가라고 손짓을 한다. 건너편 차로에서도 그걸 보고 멈춰준다. 그래서 빨간 불이지만 운전자들에게 수줍게 손인사를 건네며 길을 건넜다. 차들은 곧바로 다시 정상적으로 운행했다.


 보행자에 비해 차량 통행량이 많은 길에서는, 신호를 계속 바꾸는 것보다 이렇게 양보해 줄 때 한 명씩 건너는 게 더 효율적이다. "버튼을 누르면 초록불이 켜지는" 안전한 장치가 있더라도 그 장치가 오히려 정체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 길에서 최적의 효율을 달성하려면 보행자는 버튼을 누르지 않고 차는 보행자가 있을 때 멈춰주는 암묵적 합의가 잘 지켜져야 한다. 때로는 정해진 법보다 이런 관습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그렇게 무단횡단을 해서 집에 오는 길에 생각이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쳤다. 제도가 미비한 듯 보이는 사회도 자기만의 균형(equilibrium)을 찾아간다. 때로는 유연하지 않은 제도가 오히려 최적의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래서 모든 사회를 일관적인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한 국가에서 유익했던 정책을 다른 국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등등.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부정부패가 조직이나 국가경제 성장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경제/정치제도가 잘 갖춰지지 않은 나라에선 오히려 부정부패가 경제 효율성 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가 많이 있다 (주1). 재산권 보호나 민주주의, 법치 등이 궤도에 오르지 않은 상태에선 적당한 뇌물과 커넥션을 활용해야 생산성을 늘릴 수 있다는 뜻이다. 부패를 척결하는 게 당연히 필요한 일이지만, 사회의 발전 단계에 따라 우선수위를 다른 제도의 발전에 먼저 두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Banerjee, Duflo, Kremer도 선진국에서 잘 작동하는 원칙들이 저개발국가에서 효과가 없음을 미시적 접근을 통해 밝혀냈다. 예를 들어 무상급식이나 교재 지급이 교육효과를 개선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학생의 수요에 맞는 교육을 제공할 교사의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교사가 학교에 안 옴...). 자원을 무작정 많이 투입하는 것이 별 도움이 못 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각 사회의 필요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국가 단위의 거시경제분석보다 개인 혹은 그룹 수준에서 교육, 보건, 소액대출 등 질문을 특정하고 분석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정책 대안의 일반화는 충분한 미시적 토대 위에서만 실행해야 한다(라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주장).  


 고민상담을 할 때도 그 사람 사정은 고려 안한채 그냥 옳은 소만 하면 듣기 싫게 마련이다. 개발원조를 하든 선교를 하든 수혜자 국가의 상황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자기 기준과 자기 경험으로 유용하다고 믿는 조언을 들이밀면 역효과가 날 수 있다. 그 사회가 찾아낸 그들만의 균형에 대해 먼저 이해하고, 그 틀 안에서 필요한 조치를 권고하는 게 중요하다.


 길 건너면서 별 생각을 다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프리카 국가에 직접 살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익 중 하나가 이런 거다. 여기를 직접 경험해보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이런저런 상황을 겪고 나면 은행 같은 데서 생기는 어이 없는 도 그들만의 균형이려니 하고 이해하게 된다. 물론 한 번에 되진 않는다.



(주1) 논문이 많이 있는데 그중 하나. Méon, P. G., & Weill, L. (2010). "Is corruption an efficient grease?" World development



덧1. 이런 게 취업할 때 자소서에 쓸만한 얘기. 실제로 살짝 썼다.  


덧2. 무단횡단이나 부정부패 등의 균형이 장기적으로도 생산성에 도움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현재 가장 효율적인 상태(static efficiency)와 미래까지 감안했을 때 효율적인 상태(dynamic efficiency)는 구분되어야 한다. 사회는 계속 발전해 가야 한다는 얘기. 그래서 30년 후쯤 지나서 보면 과거의 최적 균형이 현재의 적폐가 되기도 한다.


덧3. 영국 같은 경우 보행자가 적고 차량 통행량이 많은 길에 zebra crossing 이라는 걸 둬서 사람이 지나가면 차가 무조건 멈추게 법을 만들어 놨다. 일종의 관습의 제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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